로제타와 필레: 고대 이집트 지명에서 이름을 딴 혜성 탐사선

2014년 11월 유럽우주국(ESA)의 혜성 탐사선 로제타(Rosetta) 호에 실린 탐사 로봇 필레(Philae)가 추류모프·게라시멘코(Churyumov–Gerasimenko) 혜성에 착륙하는데 성공했다.

국립국어원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공동 주관하는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이하 외심위)에서는 시사성이 있는 외래어의 규범 표기를 신속하게 결정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실무소위원회를 갖는다. ‘로제타’와 ‘추류모프·게라시멘코 혜성’은 2014년 11월 24일 발표한 2014년도 제31차 실무소위원회 결정 사항 가운데 포함되었으나 언론에서 ‘필레이’, ‘필라이’, ‘필레’로 다양하게 쓰던 탐사 로봇 Philae의 표기는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외심위 본회의로 넘어가게 되었고 2014년 12월 3일 제118차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본회의에서 비로소 ‘필레’로 결정되었다.

로제타 호는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실마리가 된 ‘로제타 석’에서 이름을 땄다. 로제타 석은 두 종류의 이집트 문자와 그리스 문자가 함께 적힌 비문으로 ‘로제타’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아랍어로는 라시드(رشيد‎ Rašīd ar[ra.ʃiːd])로 불리는 지명을 이탈리아어로는 Rosetta it[ro.ˈzet.ta] DiPI ‘로세타’로 부르는데 이것을 영어에서 그대로 따온 것으로 ‘로제타’라는 한글 표기는 영어 발음 en[roʊ̯.ˈzɛt̬.ə] EPD, LPD 를 따른 것이다. 오늘날의 표준 이탈리아어 발음에서 동일 형태소 내부의 모음 사이 s는 [z]로 발음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ㅅ’으로 적기 때문에 Rosetta에 이탈리아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로제타’가 아니라 ‘로세타’가 된다. 이탈리아어에서 모음 사이의 s는 [s] 또는 [z]로 발음되는데 그 분포는 전통 발음과 오늘날의 발음에 따라 다르고 지역에 따라도 차이가 나며 여러 단어에서 [s][z]가 둘 다 가능하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철자 s를 언제나 ‘ㅅ’으로 통일해서 적는다. 프랑스어로는 Rosette fr[ʁɔ.zɛtₔ] ‘로제트’ DPF, 독일어로는 Rosette de[ʁo.ˈzɛt.ə] Duden, DAw ‘로제테’ 또는 de[ʁo.ˈzɛt] Duden ‘로제트’로 부른다.

혜성 착륙 모듈 필레도 마찬가지로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도움을 준 ‘필레 오벨리스크’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가 발견된 필레는 고대 이집트의 사원을 포함한 유적지가 있는 나일 강의 섬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Φίλαι (Phílai) ‘필라이’라고 했고 Philae ‘필라이’는 여기에서 따온 라틴어명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한글 표기에 대한 규정은 지금까지 고시된 외래어 표기법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1986년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된 후 발간된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인명)》의 ‘일러두기’란에 ‘라틴어의 표기 원칙’과 ‘그리스어의 표기 원칙’이 포함되었으며 국립국어원은 2007년경 그리스어의 표기를 고전 그리스어와 현대 그리스어로 나누어 더 자세하게 다루는 그리스어 표기법 시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들은 정식으로 고시된 것은 아니지만 국립국어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표기를 심의할 때 따르므로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지위를 갖는다.

라틴어의 표기 원칙에서 ae는 ‘아이’로 적도록 하고 있다. 이는 ae가 고전 라틴어 발음에서 이중모음을 나타내었기 때문인데 Aëtius ‘아에티우스’, Laërtes ‘라에르테스’, Danaë ‘다나에’처럼 a와 e가 독립적으로 발음될 때는 물론 ‘아에’로 적어야 할 것이다(본 사이트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라틴어의 ae가 이중모음이 아닐 경우 aë로 적는다). 고대 그리스어의 αι (ai)도 ‘아이’로 적는다. 그러니 Philae를 라틴어 이름으로 보면 ‘필라이’로 적어야 하며 고대 그리스어 이름인 Φιλαί (Philaí)도 ‘필라이’로 적는 것이 맞다. 그런데 왜 외심위에서는 ‘필레’로 표기를 정했을까?

먼저 라틴어의 ae를 왜 ‘아이’로 적는지부터 살펴보자. 초기 라틴어(기원전 75년 이전)에서는 ae에 해당하는 음을 ai로 적었으며 이에 따라 발음은 [ai̯]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고전 라틴어에 와서는 철자가 ae로 바뀌었는데 발음은 [aɛ̯] 정도였을 것이다. [i] 같은 고모음부로 끝나는 이중모음은 덜 분명하게 발음하면 [i]를 못 미치고 [e][ɛ] 정도에서 끝날 수 있는데 라틴어의 발음은 이런 식의 변화를 겪은 듯하다. 영어와 독일어의 이중모음 [aɪ̯]도 실제 발음은 [ɪ]에 못 미친다며 정밀 전사에서는 [ae̯][aɛ̯]로 적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독일어 발음 사전인 DAw[aɛ̯]를 쓴다. 그러니 고전 라틴어의 [aɛ̯]는 우리가 ‘아이’로 적는 영어와 독일어의 [aɪ̯]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영어로 된 고전 라틴어 발음 설명에서는 흔히 ae의 발음을 영어의 [aɪ̯]로 묘사한다는 것도 라틴어의 ae를 ‘아이’로 쓰게 된 이유일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라틴어의 ae가 고대 그리스어에서 들어온 말에서 원어의 이중모음 αι (ai)를 적기 위해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스 문자의 ‘알파’ α (a)는 따로 쓰일 때 [a], ‘요타’ ι (i)는 따로 쓰일 때 [i]를 나타낸다. 고전 시기(기원전 5~4세기)의 그리스어에서 αι (ai)는 [ai̯] 정도의 이중모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고전 시기 이후에는 대체로 단순모음으로 발음하게 되었지만 후대에도 고전 그리스어를 흉내낸 학구적인 발음에서는 원래의 이중모음 발음을 의도적으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46년 코린트 전투를 기점으로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의 문화, 특히 수세기 전의 고전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로마의 엘리트 계층은 이런 보수적인 학구적 발음을 배웠기 때문에 그리스어의 αι (ai)를 라틴어의 ae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의 표기 원칙은 사실 실제 그리스어에서 쓰였던 발음을 나타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고전 시기 직후에 이미 단순모음으로 발음하기 시작하여 로마 시대 초에는 완전히 단순모음으로만 변한 αι (ai)는 ‘아이’로 적으면서 수세기가 지난 중세 그리스어에서야 [y]에서 [i]로 변한 ‘입실론’ υ (u)는 ‘이’로 적는 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즉 αι (ai)를 ‘아이’로 적는다면 υ (u)는 ‘위’로 적고 υ (u)를 ‘이’로 적는다면 αι (ai)는 ‘에’로 적어야 앞뒤가 맞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어의 표기 원칙은 고전 라틴어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받아들일 때 쓴 발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면 수수께끼가 풀린다.

당시 υ (u)의 그리스어 발음은 원순모음 [y]였으나 라틴어에는 [y] 음이 없었다. 원래는 υ (u)의 그리스어 발음이 [u]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초기 라틴어에서는 이를 u로 흔히 적었지만 그리스어 발음이 [y]로 바뀌고 난 후에 로마인들은 그리스어에서 차용한 어휘에서 이 음을 적기 위해 새로운 글자인 y를 도입했다. 당시에는 소문자가 없었고 u와 v의 구분이 없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u는 V, y는 Y이다. 이렇게 해서 라틴 문자의 일부가 된 대문자 Y는 그리스 문자에서 입실론 υ (u)의 대문자 Υ와 형태가 같다.

그리스어를 배운 로마의 엘리트 층은 그리스어에서 차용한 어휘에서 y를 [y]로 발음했겠지만 원래 라틴어에서 쓰이던 음이 아니다보니 보통 [i]로 발음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그리스어를 외국어로 배운 라틴어 화자들 가운데는 αι (ai)는 ‘아이’와 비슷한 이중모음으로 발음하면서 υ (u)는 ‘이’와 비슷한 비원순 모음으로 발음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어의 표기 원칙은 이런 이들의 그리스어 발음, 즉 라틴어의 음운 체계에 맞게 단순화시킨 고전 시기 이후의 학구적 그리스어 발음을 따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Φίλαι (Phílai)의 기원전 5세기경 고전 아티카 발음은 grc[ˈpʰí.lai̯] 정도였을 것이다(아테네가 속한 아티카 지방의 방언이 가장 영향력이 컸다). 로마의 엘리트 계층이 배운 학구적 발음도 비슷했을 것이다. 이는 고전 라틴어에서 Philae la[ˈpʰi.laɛ̯]가 되었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대로 그리스어의 αι (ai)는 고전 시기 이후에 단순모음으로 바뀌어 [ɛ]를 거쳐 [e]로 발음이 변했다. 그래서 기원전 1세기 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쓰인 코이네 그리스어 발음에서 Φίλαι (Phílai)는 grc[ˈpʰi.lɛ]가 되었고 오늘날의 현대 그리스어에서 Φίλαι (Filai)는 el[ˈfi.le]로 발음한다. 그리스어 표기법 시안에서도 현대 그리스어의 Φίλαι (Filai)는 ‘필레’로 적는다.

라틴어에서도 원래 이중모음을 나타내던 ae는 속라틴어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전 후기(3~6세기경)에는 [ɛ]로 발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중세 라틴어와 르네상스 이후의 신라틴어에서는 원래의 ae를 e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æ로 적기도 한다. 생물학에서 쓰이는 학명 등 과학 분야에서 쓰이는 라틴어는 신라틴어 발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지질 시대인 팔레오세의 ‘팔레오’는 고대 그리스어의 παλαιός (palaiós)에서 온 신라틴어 접두사 palaeo-에 해당한다.

외래어 표기 용례를 보면 Palestina를 ‘팔레스티나’로 적고 라틴어 표기법을 따른 것으로 표시한 것이 보인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어의 Παλαιστίνη (Palaistínē) ‘팔라이스티네’에서 유래한 이 지명은 고전 라틴어로 Palaestina ‘팔라이스티나’라고 했으며 Palestina는 신라틴어 형태이다. 지금은 영어 이름인 Palestine en[ˈpæl.ᵻ.staɪ̯n] EPD, LPD 의 통용 표기인 ‘팔레스타인’을 주로 쓴다(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원래 ‘팰리스타인’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나 ‘팔레스타인’을 관용 표기로 인정한다). 또 라틴어 표기법을 따랐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고대 그리스어의 Αἰθιοπία (Aithiopía) ‘아이티오피아’에서 유래한 국명 Ethiopia는 ‘에티오피아’로 적는다. 고전 라틴어로는 Aethiopia ‘아이티오피아’라고 했다.

외래어 표기 용례 중에 원 철자를 ae로 주면서 신라틴어 발음을 따라 ‘에’로 적은 예는 이보다도 많다. 고대 그리스어의 Ἀθῆναι (Athênai)에서 온 라틴어 Athenae는 ‘아테네’로, Θῆβαι (Thêbai)에서 온 Thebae는 ‘테베’로, Μυκῆναι (Mukênai)에서 온 Mycenae는 ‘미케네’로, Θερμοπύλαι (Thermopúlai)에서 온 Thermopylae는 ‘테르모필레’로, Νίκαια (Níkaia)에서 온 Nicaea는 ‘니케아’로, Ἀχαιμένης (Akhaiménēs)에서 온 Achaemenes는 ‘아케메네스’로 적는다. 원어를 영어인 Aegean으로 표시한 ‘에게 해’도 Αἰγαί (Aigaí)에서 온 Aegae를 원어로 본다면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참고로 테베는 그리스의 지명이자 오늘날 룩소르의 일부에 해당하는 이집트의 고대 도시 이름이기도 한데 이와 같이 고대 이집트의 지명은 고대 그리스어 이름에서 온 라틴어 이름의 형태로 알려진 것이 많다. 이집트 고왕국의 수도였던 Memphis ‘멤피스’는 Μέμφις (Mémphis) ‘멤피스’에서 왔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는 Ἀλεξάνδρεια (Aleksándreia) ‘알렉산드레(이)아’에서, 카이로의 북서쪽에 있는 Heliopolis ‘헬리오폴리스’는 Ἡλιούπολις (Hēlioúpolis) ‘헬리우폴리스’에서, 아스완의 유적지 Elephantine ‘엘레판티네’ 섬은 Ελεφαντίνη (Elephantínē) ‘엘레판티네’에서 왔다.

국명인 에티오피아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비롯한 정착된지 오래되고 지명도가 높은 이름에서 라틴어의 ae를 ‘에’로 적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ae를 단순모음으로 발음한 속라틴어로부터 발달한 로망 제어(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등)는 물론 현대 유럽의 언어에서는 하나같이 고전 라틴어의 ae에 해당하는 음을 전통적으로 단순모음으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어로 아테네는 Atene it[a.ˈtɛː.ne] DiPI ‘아테네’, 테베는 Tebe it[ˈtɛː.be] DiPI ‘테베’이다. 고전 라틴어 발음을 따른다고 ae를 ‘아이’로 적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서 Caesar ‘카이사르’ 등 고대 로마와 관련된 어휘는 표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고대 로마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명과 지명은 ae를 ‘에’로 적던 기존의 표기를 그대로 둔 것이 대부분이다.

Philae의 경우 이탈리아어로는 File it[ˈfiː.le] DiPI ‘필레’, 독일어로는 Philae de[ˈfiː.lɛ] DAw 또는 Philä de[ˈfiː.lɛ] Duden ‘필레’, 프랑스어로는 Philæ fr[fi.le] DPF ‘필레’로 부른다. 영어에서는 전통적으로 Philae en[ˈfaɪ̯l.iː] MWGD ‘파일리’로 부르지만 Philae 자체가 잘 알려진 이름이 아니라서 일반인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발음이다. 영어는 대모음 추이의 결과로 라틴어에서 온 이름을 전통적으로 발음하는 방식이 다른 유럽 언어에 비해 원래의 라틴어 발음에서 상당히 멀어져 철자만 보고 라틴어계 어휘의 발음을 짐작하는 것이 꽤 까다롭다. 그래서인지 혜성 착륙 시도를 보도한 방송에서는 물론 유럽우주국 직원들도 다른 유럽 언어에서 쓰이는 발음을 흉내내어 영어로 en[ˈfiːl.eɪ̯] ‘필레이’로 흔히 발음하는 듯하다. 영어에서는 어말에 [ɛ]가 올 수 없으므로 한글로 ‘필레’로 적는 발음은 영어로 불가능하다.

유럽우주국의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으며 관제 센터는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다. 유럽우주국의 공용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이며 탐사 로봇 필레의 제작에는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스위스, 아일랜드, 에스파냐,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캐나다,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가 참여했다. 그러니 특별히 Philae의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할 필요는 없고 프랑스어와 독일어에서 쓰는 발음에 따른 표기가 ‘필레’라는 것이 외심위의 최종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수가 있다.

참고로 미 항공우주국의 Apollo ‘아폴로’ 계획은 영어 발음인 en[ə.ˈpɒl.oʊ̯] EPD, LPD 에 따르면 ‘어폴로’ 계획으로 써야 하니 ‘아폴로’는 라틴어 이름으로 본 표기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기는 현행 외래어 표기법 제정 이전인 1960~70년대 당시 썼던 것을 그대로 인정한 것으로 원래 영어 대신 라틴어 발음을 고려해서 정한 표기였다고 보기 어렵다. Apollo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 Ἀπόλλων (Apóllōn) ‘아폴론’을 로마 신화에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쓴 라틴어 이름이다.

지금까지 여러 언어에서 쓰이는 Philae의 발음을 살펴보았는데 한글 표기는 어느 언어의 발음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먼저 이집트의 지명으로서의 Philae부터 살펴보자.

외래어 표기법에서 지명의 표기는 원지음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제3국의 발음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은 관용을 따르도록 한다. 오늘날 이집트는 아랍어 사용국이므로 Philae는 현지어 이름이 아니다(아랍어 이름은 فيله‎ Fīlah ar[fiː.la] ‘필라’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은 영어의 Philae ‘파일리’, 독일어의 Philae/Philä ‘필레’, 프랑스어의 Philæ ‘필레’, 이탈리아어의 File ‘필레’ 등 라틴어의 Philae ‘필라이’에서 기원한 것들이다. 물론 현대 그리스어 Φίλαι (Filai) ‘필레’는 라틴어를 거치지 않은 고대 그리스어의 Φίλαι (Phílai) ‘필라이’의 직계손인데 그리스어 표기 시안을 보면 지명은 원칙적으로 현대 그리스어 표기법을 적용하게 되어있으니 그리스어로 표기한다 해도 ‘필레’가 맞다. 그러니 영어를 제외한 여러 언어에서 Philae 및 그 변형들은 한글로는 ‘필레’로 표기된다. Philae를 ‘필레’로 적는 것은 아테네, 테베, 미케네 등의 신라틴어식 표기 방식과도 일치한다. 그러니 이집트의 지명 Philae는 ‘필레’로 적을만한 근거가 충분하다.

로제타 호가 지명 로제타의 한글 표기를 그대로 따른 것처럼 지명 Philae를 따른 탐사 로봇도 같은 한글 표기를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명의 표기를 잠시 제쳐두고 탐사 로봇의 이름 표기만 생각해보자. 우선 라틴어 이름으로 보고 표기한다면 실제 외래어 표기 용례에서 라틴어의 표기 원칙의 적용 범위는 고대 로마 관련된 표기에 한정되고 과학 분야에서 쓰이는 라틴어는 이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할만하다. 과학 분야의 라틴어는 고전 라틴어 발음이 아니라 신라틴어 발음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유럽우주국의 세 공용어 가운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기준으로 해도 ‘필레’이고 심지어 영어에서도 Philae의 전통적 발음인 ‘파일리’ 대신 프랑스어와 독일어 발음을 흉내낸 ‘필레이’를 흔히 쓴다는 점이 탐사 로봇의 표기를 ‘필레’로 정하는 과정에서 고려되었을 수 있다.

외심위의 결정은 탐사 로봇의 이름인 Philae을 ‘필레’로 표기한다는 것이지 그 이름의 근원인 이집트의 지명 Philae의 표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지명 Philae도 ‘필레’로 적는 것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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