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이제는 영어로 Czechia ‘체키아’라고 불러주세요

지난 4월 14일 체코의 대통령과 총리, 상하원 의장, 외무장관, 국방장관 등은 체코의 영어 약식 국명을 공식적으로 Czechia [ˈʧɛk.i‿ə] 체키아로 통일하기로 결정하고 내각의 동의를 얻으면 유엔에 등록을 신청하기로 했다. 현재 정식 국명인 the Czech Republic [ðə.ˈʧɛk.ɹᵻ.ˈpʌb.lɪk] 더 첵 리퍼블릭, 즉 ‘체코 공화국’으로만 통용되고 있는 것이 너무 거추장스럽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식 국명이 길면 일상적으로 그 나라를 이를 때는 가급적이면 한 단어로 줄여서 부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정식 국명은 영어로 the French Republic [ðə.ˈfɹɛnʧ.ɹᵻ.ˈpʌb.lɪk] 더 프렌치 리퍼블릭, 즉 ‘프랑스 공화국’이지만 약식 국명인 France [ˈfɹæːns] 프랜스, 즉 ‘프랑스’로 통용된다. 그런데 체코는 현재 영어에서 the Czech Republic을 줄여 부를 수 있는 약식 국명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Czechia라는 이름을 보급하자는 것이 체코 정부의 바람이다.

Czech [ˈʧɛk] 은 영어로 ‘체코 사람’, ‘체코어’를 뜻하는 명사인 동시에 ‘체코의’를 뜻하는 형용사이지만 나라 이름은 아니다. 마치 French 프렌치가 영어로 ‘프랑스어’를 뜻하는 명사인 동시에 ‘프랑스의’를 뜻하는 형용사이지만 나라 이름은 아니고 France가 나라 이름인 것과 같다. 그래서 French/France에 대응하는 단어쌍으로 Czech/Czechia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뉜 후 한국어의 ‘체코’를 비롯하여 독일어의 Tschechien [ˈʧɛ.çi̯ən] 체히엔, 러시아어의 Чехия Chekhiya [ˈʨe.xʲɪ.jə] 체히야 등 여러 언어에서 체코에 해당하는 한 단어짜리 약식 국명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Czechia라는 약식 국명을 쓰자는 움직임이 별 호응이 없이 묻히고 정식 국명인 the Czech Republic으로만 통하게 되었다.

그러니 약식 국명을 쓰자는 체코 정부의 요청은 영어처럼 정식 국명만 쓰는 언어에 한정된 것이다. 그런데 주로 외신을 번역한 국내 언론 보도에서는 이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체코’는 형용사이니 나라 이름으로는 잘못되었다고 한 곳도 있는데 영어의 Czech은 형용사이지만 한국어에서는 ‘체코’가 나라 이름으로 쓰이니 잘못된 번역이다. 또 정식 국명을 the Czech Republic에서 Czechia로 바꾼다고 한 곳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정식 국명은 여전히 the Czech Republic이고 이와 병행하여 쓸 약식 국명을 Czechia로 통일하자는 것이다.

보헤미아, 모라비아, 체코령 실레시아

체코는 역사적으로 보헤미아(라틴어: Bohemia, 체코어: Čechy [ˈʧɛ.xɪ] 체히)와 모라비아(라틴어: Moravia, 체코어: Morava [ˈmo.ra.va] 모라바), 실레시아(라틴어: Silesia, 체코어: Slezsko [ˈslɛs.sko] 슬레스코) 세 지방으로 구분한다. 이들을 합쳐 České země [ˈʧɛs.kɛː.ˈzɛ.mɲɛ] 체스케 제메, 즉 ‘체코의 땅들’ 또는 ‘체코의 나라들’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현재 독일과 폴란드 영토인 루사티아(라틴어: Lusatia, 체코어: Lužice [ˈlu.ʒɪ.ʦɛ] 루지체, 독일어: Lausitz [ˈlaʊ̯.zɪʦ] 라우지츠, 폴란드어: Łużyce [wu.ˈʐɨ.ʦɛ] 우지체)도 České země에 포함되었지만 오늘날의 체코 영토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영어에서는 1993년 이전의 현재 체코 영토를 이를 때 ‘체코 공화국’을 뜻하는 the Czech Republic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the Czech Lands [ðə.ˈʧɛk.ˈlændz] 더 첵 랜즈라는 České země에 대응되는 표현을 쓴다.

체코의 세 지방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수도 프라하(체코어: Praha [ˈpra.ɦa])가 속한 보헤미아이다. 라틴어 이름 Bohemia는 원래 그 지역에 정착했던 켈트족, 구체적으로는 갈리아족의 일파인 보이족(라틴어 복수형: Boius 보이우스, 복수형: Boii 보이이)의 부족명에 ‘집’, ‘거주지’를 뜻하는 고대 게르만어 *haimaz를 붙인 것으로 보이는 라틴어 Boiohaemum 보이오하이뭄에서 유래했다. 6세기경 보헤미아 중부에 슬라브족의 일파인 체코족(체코어 단수형: Čech [ˈʧɛx] 체흐, 복수형: Češi [ˈʧɛ.ʃɪ] 체시 또는 Čechové [ˈʧɛ.xo.vɛː] 체호베; 체코어에서 이 단어는 ‘보헤미아 사람’, ‘체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쓰임)이 정착했기 때문에 체코어로는 보헤미아를 Čechy [ˈʧɛ.xɪ] 체히라고 부르며 폴란드어로도 Czechy [ˈʦ̢ɛ.xɨ] 체히라고 부른다. Čechy는 Čech의 비활동체 복수형으로 옛 체코어의 나라 이름 조어법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럽 언어에서는 영어의 Bohemia [boʊ̯.ˈhiːm.i‿ə] 보히미아, 프랑스어의 Bohême [bɔ.ɛmə] 보엠, 독일어의 Böhmen [ˈbøː.mən] 뵈멘 등 라틴어 이름 보헤미아에서 온 이름을 쓴다.

19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집시’로 흔히 알려진 유랑 민족인 롬족이 보헤미아를 통해서 왔다고 잘못 알려져 이들을 프랑스어로 Bohémiens [bɔ.e.mjɛ̃] 보에미앵, 즉 ‘보헤미아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가난한 예술가들이 낮은 집세를 찾아 롬족이 사는 동네에 모여들고 이들의 방랑 생활을 동경하며 스스로 ‘보헤미아인’으로 자처하면서 ‘보헤미안(영어: Bohemian [boʊ̯.ˈhiːm.i‿ən] 보히미언)’은 엉뚱하게도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예술가를 뜻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보헤미아에도 롬족이 있었고 자유분방함, 특히 종교의 자유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보헤미안’을 어원상으로 따지면 프랑스인들의 오해로 지어진 말이니 체코의 보헤미아와는 별 관계가 없다.

보헤미아는 체코 영토의 66%를 차지하고 전체 인구 1천 만 가운데 약 6백 만이 살고 있으니 수적으로도 체코를 대표하는 지방이다.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체코어: Antonín Dvořák [ˈan.to.ɲiːn.ˈdvo.r̝aːk], 1841년~1904년), 작가 프란츠 카프카(독일어: Franz Kafka [ˈfʁanʦ.ˈkaf.ka], 1883년~1924년),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체코어: Miloš Forman [ˈmɪ.loʃ.ˈfor.man], 1932년 태생), 테니스 선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체코어: Martina Navrátilová [ˈmar.cɪ.na.ˈna.vraː.cɪ.lo.vaː], 1956년 태생) 등이 모두 보헤미아 출신이다. 이 가운데 카프카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체코는 체코인들 뿐만이 아니라 독일인(오스트리아인 포함) 주민이 많았으며 폴란드인과 헝가리인, 유대인 등이 사는 다민족 지역이었다.

모라비아는 현재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경계를 이루는 모라바 강(체코어: Morava [ˈmo.ra.va])에서 이름을 땄다. 체코어로는 지방과 강 이름이 둘 다 Morava 모라바로 똑같다. 833년경 출현해서 906년 또는 907년까지 존재한 중세 국가인 대모라비아(라틴어: Moravia Magna 모라비아 마그나)는 중부 유럽에 등장한 최초의 대규모 슬라브계 국가로 정확한 강역은 알 수 없지만 모라바 강 유역이 중심 영토였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대표 도시는 브르노(체코어: Brno [ˈbr̩.no])이며 체코 영토의 28%를 차지하고 인구는 약 3백만이다. 작가 밀란 쿤데라(체코어: Milan Kundera [ˈmɪ.lan.ˈkun.dɛ.ra], 1929년 태생), 아르누보 화가 알폰스 무하(체코어: Alfons Mucha [ˈal.fons.ˈmu.xa], 1860년~1939년), 독일의 철학자 에트문트 후설(독일어: Edmund Husserl [ˈɛt.mʊnt.ˈhʊ.sɐl], 1859년~1938년) 등이 모라비아 출신이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독일어: Gustav Mahler [ˈɡʊs.taf.ˈmaː.lɐ, -taːf-], 1860년~1911년)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경계 지역 출신이다.

체코어로 Slezsko 슬레스코라고 하는 실레시아는 현재 폴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 독일에 걸쳐있는 지방으로 폴란드어로는 Śląsk [ˈɕlɔ̃sk] 실롱스크, 독일어로는 Schlesien [ˈʃleː.zi̯ən] 슐레지엔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체코령 실레시아는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와 거의 일치한다. 대표 도시는 오스트라바(체코어: Ostrava [ˈo.stra.va])이며 예전에는 오파바(체코어: Opava [ˈo.pa.va])가 체코령 실레시아의 수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5년 독일인들이 추방되기 전까지 독일어 사용 주민이 많이 살던 곳으로 유전학의 아버지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그레고어 멘델(독일어: Gregor Mendel [ˈɡʁeː.ɡoːɐ̯.ˈmɛn.dl̩], 1822년~1884년)이 현재의 체코령 실레시아 출신이다. 테니스 선수 이반 렌들(체코어: Ivan Lendl [ˈɪ.van.ˈlɛn.dl̩], 1960년 태생)도 이 지방 출신이다. 체코령 실레시아는 체코 전체 면적의 6%에 지나지 않고 인구도 1백 만 뿐이며 1782년 이후 대체로 모라비아와 같은 행정 단위에 속했으므로 때로는 따로 취급하지 않고 모라비아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보헤미아 왕관령

헝가리인의 침입으로 슬라브계 중세 국가 대모라비아가 분열되면서 그 일부였던 보헤미아는 9세기 말 공국으로 독립한 뒤 이웃하는 모라비아와 실레시아를 정복하고 1200년경에는 보헤미아 왕국으로 격상되었다. 14세기에 보헤미아 왕 카렐 4세(체코어: Karel [ˈka.rɛl], 독일어: Karl [ˈkaʁl] 카를; 1316년~1378년)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면서 보헤미아의 프라하가 제국의 수도가 되는 등 최전성기를 누렸다. 1526년 보헤미아 왕위를 합스부르크 왕가가 물려받은 이후로도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본령인 오스트리아에 버금가는 중요한 지역이었으나 30년 전쟁(1618년~1648년)의 초기 전투인 1620년의 빌라호라(체코어: Bílá hora [ˈbiː.laː.ˈɦo.ra]) 전투에서 보헤미아 군대가 제국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독립을 잃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령이 되었다. 그래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도 보헤미아 왕국이라는 이름과 지위는 존속되었다. 모라비아 변경백령과 저지 실레시아·고지 실레시아 공작령은 보헤미아 왕국의 일부가 되지는 않았지만 보헤미아 왕이 스스로 또는 봉신을 통해 다스리는 이른바 보헤미아 왕관령에 속했다.

이처럼 1918년까지의 근대 역사에서 체코의 3대 지방 가운데 보헤미아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영어 및 다른 유럽 언어에서는 역사적으로 보헤미아가 체코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쓰였다. 그런데 19세기 국민주의(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보헤미아와 구분되는 이름이 필요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가운데서도 부유하고 강성한 지역이었던 보헤미아 왕관령은 특히 독일어 사용 인구를 비롯한 여러 민족의 터전이 되었다. 보헤미아인이라는 이름은 체코어를 쓰든 독일어를 쓰든 보헤미아 왕관령의 주민을 모두 가리켰기 때문에 슬라브어인 체코어를 쓰는 주민들을 구별해서 이르기 위해 Czech [ˈʧɛk] 이라는 민족명 및 형용사가 19세기부터 영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이름은 체코인들의 조상인 체코족은 물론 보헤미아인, 체코인을 아울러 이르는 체코어 이름 Čech 체흐에서 왔다. 1842년의 체코어 철자법 개정 전에는 č를 cž로 적었으므로 영어의 Czech은 옛 체코어 철자 Cžech 체흐를 따른 것이다. 옛 체코어 철자법은 폴란드어 철자법과 비슷했는데 폴란드어는 비슷한 음인 [ʦ̢]를 cz로 적으며 이 단어를 Czech [ˈʦ̢ɛx] 체흐라고 쓴다.

한편 중세 대모라비아에서 헝가리인들에게 정복된 동쪽 지역의 슬라브인들은 1918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들이 슬로바키아인들이다. 지금도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는 상당 부분 서로 의사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매우 가깝다. 16세기에는 보헤미아와 마찬가지로 헝가리 왕국도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차지가 되었지만 그 이름과 지위는 존속되었으며 1867년에는 합스부르크 영토 내에서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어 이른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말은 근대 국민국가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시기로 보헤미아 왕관령의 체코인들은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맞서, 헝가리 왕국의 슬로바키아인들은 헝가리어를 쓰는 헝가리의 지배에 맞서 자결권을 얻으려 하였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서로 힘을 합쳤고 나중에는 아예 한 나라로 합치자는 논의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탄생과 분리

이 신생국의 체코어 및 슬로바키아어 이름은 Česko-Slovensko 또는 Československo 체코어: [ˈʧɛ.sko.slo.vɛn.sko], 슬로바키아어: [ˈʧe.sko.slo.ʋen.sko] 체스코슬로벤스코였다. 1918년~1920년과 1938년~1939년에는 붙임표를 쓴 Česko-Slovensko였고 1920년~1938년과 1945년 후 공산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붙임표 없이 쓴 Československo였다.

이 이름은 ‘체코의’를 뜻하는 형용사 český 체코어: [ˈʧɛ.skiː], 슬로바키아어: [ˈʧe.skiː] 체스키와 ‘슬로바키아의’를 뜻하는 형용사 slovenský 체코어: [ˈslo.vɛn.skiː], 슬로바키아어: [ˈslo.ʋen.skiː] 슬로벤스키를 접요사 -o-로 연결한 형용사형 česko(-)slovenský 체코어: [ˈʧɛ.sko.slo.vɛns.kiː], 슬로바키아어: [ˈʧe.sko.slo.ʋens.kiː] 체스코슬로벤스키를 만든 다음 그 어미를 -sko로 바꾸어 중성 명사로 바꾼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체코어에서는 나라 이름을 만들 때 이처럼 -sko로 끝나는 중성 명사를 쓰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česk(ý) + -o- + sloven|ský → -sko = Česko-Slovensko/Československo

그전까지 ‘보헤미아’라는 이름을 쓰던 다른 여러 언어에서는 이 새 이름을 번역해서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체코의’를 뜻하는 형용사 Czech 에 ‘슬로바키아의’를 뜻하는 형용사 Slovak [ˈsloʊ̯.væk, -vɑːk] 슬로백/슬로바크(‘슬로바키아인’을 뜻하는 체코어·슬로바키아어 남성 단수형 Slovák 체코어: [ˈslo.vaːk], 슬로바키아어: [ˈslo.ʋaːk] 슬로바크에서 유래)를 접요사 -o-로 연결한 Czechoslovak [ˌʧɛk.oʊ̯.ˈsloʊ̯.væk, -vɑːk] 체코슬로백/체코슬로바크라는 형용사형을 만들고 여기에 영어에서 일반적으로 나라 이름을 만들 때 쓰는 접미사 -ia를 붙여 Czechoslovakia [ˌʧɛk.oʊ̯.sloʊ̯.ˈvæk.i‿ə, -vɑːk-] 체코슬로배키아/체코슬로바키아로 썼다.

Czech + -o- + Slovak + -ia = Czechoslovakia

다른 언어에서도 비슷한 이름을 만들어 썼다.

  • 체코어: Československo [ˈʧɛ.sko.slo.vɛn.sko] 체스코슬로벤스코
  • 영어: Czechoslovakia [ˌʧɛk.oʊ̯.sloʊ̯.ˈvæk.i‿ə, -vɑːk-] 체코슬로배키아/체코슬로바키아
  • 프랑스어: Tchécoslovaquie [tʃe.kɔs.lɔ.va.ki] 체코슬로바키
  • 이탈리아어: Cecoslovacchia [ʧe.koz.lo.ˈvak.kja] 체코슬로바키아
  • 독일어: Tschechoslowakei [ˌʧɛ.ço.slo.va.ˈkaɪ̯] 체호슬로바카이
  • 폴란드어: Czechosłowacja [ˌʦ̢ɛ.xɔ.swɔ.ˈva.ʦja] 체호스워바치아/체호스와바차
  • 러시아어: Чехословакия Chekhoslovakiya [ʨɪ.xə.slɐ.ˈva.kʲɪ.jə] 체호슬로바키야

이 가운데 독일어에서는 나라 이름에서 흔히 쓰는 Belgien [ˈbɛl.ɡi̯ən] 벨기엔 (벨기에), Rumänien [ʁu.ˈmɛː.ni̯ən] 루메니엔 (루마니아) 등의 단수 중성 어미 -ien 대신 상대적으로 드문 Türkei [tʏʁ.ˈkaɪ̯] 튀르카이 (터키), Mongolei [ˌmɔŋ.ɡo.ˈlaɪ̯] 몽골라이 (몽골) 등의 복수 여성 어미인 -ei를 쓴 것이 특기할만하다. 아마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합친 나라라서 복수형 어미가 어울린다고 본 것이리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 아래 공산권에 들어간 체코슬로바키아는 1960년에는 개헌과 함께 정식 국명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1989년 이른바 벨벳 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체코어: Václav Havel [ˈvaːʦ.laf|ˈɦa.vɛl → ˈvaːʦ.lav.ˈɦa.vɛl], 1936년~2011년)은 국호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을 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슬로바키아가 체코와 동등한 지위를 누릴 것을 요구한 슬로바키아의 정치인들이 단순히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논쟁 끝에 정식 국호는 1990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민족 자결권을 위해 손잡았던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각자 제갈길을 가기로 합의한 것이다. 1993년 1월 1일을 기해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평화롭게 분리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국명

이른바 벨벳 이혼으로 태어난 두 신생국 가운데 슬로바키아의 국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에서 뒷부분만 따로 떼어내면 그만이었다.

  • 체코어: Slovensko [ˈslo.vɛn.sko] 슬로벤스코
  • 영어: Slovakia [sloʊ̯.ˈvæk.i‿ə, -vɑːk-] 슬로배키아/슬로바키아
  • 프랑스어: Slovaquie [slɔ.va.ki] 슬로바키
  • 이탈리아어: Slovacchia [zlo.ˈvak.kja] 슬로바키아
  • 독일어: Slowakei [slo.va.ˈkaɪ̯] 슬로바카이
  • 폴란드어: Słowacja [swɔ.ˈva.ʦja] 스워바치아/스워바차
  • 러시아어: Словакия Slovakiya [slɐ.ˈva.kʲɪ.jə] 슬로바키야

그런데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에서 체코를 뜻하는 앞부분은 대부분 형용사형에 접요사 -o-를 붙인 연결형이었기 때문에 나라 이름으로 바꾸려면 형태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영어의 Czecho-는 연결형으로만 쓸 수 있지 그 자체가 나라 이름이 될 수 없다. 영어에서 쓰이는 비슷한 연결형으로 France ‘프랑스’를 뜻하는 Franco-, Russia ‘러시아’를 뜻하는 Russo-, India ‘인도’를 뜻하는 Indo-, China (라틴어 Sinae 시나이) ‘중국’을 뜻하는 Sino- 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Franco-Prussian War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Russo-Japanese War ‘러일전쟁’, Indo-European languages ‘인도·유럽 어족’, Sino-Tibetan languages ‘중국·티베트 어족’ 등의 표현에 쓰인다. Indo-가 한자 음차 표기인 ‘인도(印度)’와 형태가 유사하지만 단순한 우연일 뿐이며 영어에서 단독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체코어에서는 ‘체코의’를 뜻하는 형용사 český 체스키에 Slovensko 슬로벤스코와 마찬가지로 어미를 -sko로 바꾸어 중성 명사로 만든 Česko [ˈʧɛ.sko] 체스코를 새 국명으로 도입하였다. 이 이름은 1777년에도 쓴 기록이 있지만 원래는 ‘보헤미아’를 나타냈는데 1960년대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라는 뜻으로 조금씩 쓰이기 시작하였다. 체코어에서 형용사 český 체스키와 종족명 Čech 체흐는 ‘보헤미아의’와 ‘보헤미아 사람’을 뜻할 수도 있고 ‘체코의’와 ‘체코 사람’을 뜻할 수도 있는 중의성이 있다. 하지만 옛 조어법을 따른 이름인 Čechy 체히는 역사적 용법 때문에 원래 보헤미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보헤미아 뿐만이 아니라 모라비아와 실레시아도 아우를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해서 도입된 이름이 Česko이다. 처음에는 체코인들도 어색하다고 쓰지 않고 체코 전체를 이를 때에도 Čechy라고 부르거나 정식 명칭인 Česká republika [ˈʧɛ.skaː.ˈrɛ.pu.blɪ.ka] 체스카 레푸블리카, 즉 ‘체코 공화국’을 쓰는 경우도 많았지만 오늘날에는 Česko가 ‘체코’의 체코어 이름으로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Čech + -y = Čechy ‘보헤미아’
če|ský → -sko = Česko ‘체코’
sloven|ský → -sko = Slovensko ‘슬로바키아’

독일어에서는 Slowakei 슬로바카이처럼 -ei 어미를 써서 Tschechei [ʧɛ.ˈçaɪ̯] 체하이로 쓰면 쉽겠지만 공교롭게도 1938~39년에 체코를 합병하고 슬로바키아에 괴뢰 정권을 세운 나치 독일이 쓴 용어라서 어감이 좋지 않다. 그 대신 단수 중성 어미 -ien을 쓴 Tschechien [ˈʧɛ.çi̯ən] 체히엔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사실 Tschechien은 1918년 이전부터 독일어에서 써오던 이름인데 체코슬로바키아 탄생 이후 Tschechei에 밀렸다가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 이후 부활한 것이다.

러시아어에서는 Словакия Slovakiya 슬로바키야처럼 -ия -iya 어미를 써서 Чехия Chekhiya [ˈʨe.xʲɪ.jə] 체히야로 부른다. 반면 폴란드어에서는 Słowacja 스워바치아/스워바차를 본딴 새로운 이름을 만들지 않고 ‘보헤미아’를 뜻하는 옛 이름 Czechy 체히를 그대로 체코의 국명으로 재활용했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서도 각각 Slovaquie 슬로바키의 -ie 어미, Slovacchia 슬로바키아의 -ia 어미를 쓴 Tchéquie [ʧe.ki] 체키, Cechia [ˈʧɛː.kja] 체키아가 도입되었지만 실제로는 정식 국명인 République tchèque [ʁe.py.blikə.tʃɛkə] 레퓌블리크 체크와 Repubblica Ceca  [re.ˈpub.bli.ka.ˈʧɛː.ka] 레푸블리카 체카가 더 널리 쓰인다. 예전부터 ‘체코의’를 뜻하는 형용사형 tchèque 체크, ceco/ceca 체코/체카는 익숙했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나라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낯설어 망설여지니 그냥 ‘공화국’을 뜻하는 말에 형용사형을 쓴 정식 국명을 쓰는 것이 편하다고 느낀 것이다.

‘체코’의 영어 약식 국명 찾기

영어에서의 상황도 비슷하다. 형용사형 Czech 은 친숙하지만 이에 해당하는 한 단어짜리 나라 이름은 언뜻 떠오르지 않으니 그냥 정식 국명인 the Czech Republic 더 첵 리퍼블릭을 쓰는 것이 편해 지금까지 약식 국명 대신 쓰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 직후에도 약식 국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다. 혹자는 England  [ˈɪŋ.ɡlənd] 잉글런드/잉런드 (잉글랜드), Finland [ˈfɪn.lənd] 핀런드 (핀란드), Poland [ˈpoʊ̯l.ənd] 폴런드 (폴란드), Thailand [ˈtaɪ̯.lænd, -lənd] 타일랜드/타일런드 (타이/태국)처럼 -land를 붙인 Czechland [ˈʧɛk.lənd] 체클런드 를 쓰자고 하였다. 또 the Netherlands [ðə.ˈnɛð.əɹ.ləndz] 더 네덜런즈 (네덜란드)처럼 복수형을 써서 the Czech Lands 더 첵 랜즈라는 표현과 비슷하게 the Czechlands [ðə.ˈʧɛk.ləndz] 더 체클런즈 라고 쓰자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영어에서 나라 이름을 만들 때 가장 흔한 방식은 -ia 어미를 붙이는 것이고 Slovakia 슬로배키아/슬로바키아에서도 이 어미가 쓰이므로 Czechia 체키아를 쓰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라틴어에서는 1634년에 이미 Czechia라고 쓴 기록이 있으며 영어에서는 1841년에 처음 쓰인 역사 깊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Czech + -ia = Czechia
Slovak + -ia = Slovakia

하지만 체코와 슬로바키아 분리 직후에는 공식 국명인 the Czech Republic이 이미 워낙 익숙해져 Czechia가 비집을 틈이 없었다. 체코인들조차 자국어로 Česko 체스코가 낯설어 Česká republika 체스카 레푸블리카라는 정식 국명을 선호하던 참에 약식 국명 Czechia가 생명력을 얻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니 일반 영어 화자들은 대체로 체코의 약식 국명을 모른다. 하지만 일일이 the Czech Republic이라 부르기는 번거롭기에 일부 화자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은 입말에서 형용사인 Czech을 나라 이름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그는 체코에 산다’를 She lives in the Czech Republic 대신 She lives in Czech이라고 쓰는 식이다. 물론 문법적으로 틀린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격식을 차린 언어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영어에서 한 단어짜리 약식 국명이 없는 나라 가운데 도미니카 공화국(the Dominican Republic [ðə.də.ˈmɪn.ɪk.ən.ɹᵻ.ˈpʌb.lɪk] 더 더미니컨 리퍼블릭)과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 [ˌsaʊ̯d.i.ə.ˈɹeɪ̯b.i‿ə, ˌsɔːd-] 사우디어레이비아/소디어레이비아)가 있다. 약칭이 도미니카(Dominica [dɒm.ɪ.ˈniː.kə])인 도미니카 연방이 따로 있기 때문에 도미니카 공화국은 도미니카로 줄여 쓰지 않는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the Dominican, Saudi로 줄여 쓰는 것을 간혹 볼 수 있다(예: He went to the Dominican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에 갔다’, We passed through Saudi ‘우리는 사우디아라비아를 통과하였다’). 물론 마찬가지로 격식을 차린 언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용법이다. 한국어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를 간결하게 ‘사우디’로 부를 때가 많은데 신문 기사 제목 같은 곳에서는 많이 쓰이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실리지 않은 준말이다.

Czechia에 대한 반대 의견

체코 정부에서 약식 국명을 Czechia 체키아로 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발하는 이들도 많다. 주로 지금껏 잘 쓰던 이름을 두고 굳이 낯선 새 이름을 쓸 필요가 있느냐는 예견된 반응이지만 더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반대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영어에서 러시아 연방의 체첸 자치 공화국을 뜻하는 Chechnya [ʧɛʧ.ˈnjɑː, ˈʧɛʧ.ni‿ə] 체치냐/체치니아를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영어의 Chechnya는 러시아어의 나라 이름 Чечня Chechnya [ʨɪ.ˈʨnʲa] 체치냐에서 따온 것이다. ‘체첸 사람’을 뜻하는 명사 또는 ‘체첸의’를 뜻하는 형용사는 영어로 Chechen [ˈʧɛʧ.ɛn, –ən] 체첸이다. 한국어의 ‘체첸’은 사실상 여기에서 온 것으로 봐야 한다. 러시아어에서는 ‘체첸 사람’은 남성형은 чеченец chechenets [ʨɪ.ˈʨe.nʲɪʦ] 체체네츠, 여성형은 чеченка chechenka [ʨɪ.ˈʨen.kə] 체첸카이며 형용사 ‘체첸의’는 чеченский chechenskiy [ʨɪ.ˈʨen.skʲɪj] 체첸스키이다. 러시아어 속어로 드물게 ‘체첸 사람’을 чечен chechen [ʨɪ.ˈʨen] 체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한국어에서 쓰는 ‘체첸’은 영어식 표현이다. 참고로 체첸어로는 나라 이름을 Нохчийчоь, Noxçiyçö [nox.ʧi.ʧyø] 노흐치최라고 하고 ‘체첸 사람’은 Нохчий Noxçiy [nox.ʧiː] 노흐치라고 하니 ‘체첸’과 Chechnya는 체첸어에서는 쓰이지 않는 외래명, 즉 외부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실제 2013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터진 폭탄 테러의 용의자가 체첸인(Chechens)으로 지목되자 많은 미국인들이 체첸과 체코를 구분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여 주미 체코 대사가 체코와 체첸은 전혀 다른 국가라고 해명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있었다. 나라가 the Czech Republic으로 알려져 있는데도 이런 혼동이 일어나는 판에 Czechia로 바꾸면 Chechnya와 더욱더 비슷해진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이런 반응의 일부는 Czechia의 발음을 잘못 알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올바른 발음은 [ˈʧɛk.i‿ə] 체키아인데 철자만 보고 발음이 [ˈʧɛʧ.i‿ə] 체치아인 줄 아는 이들이 꽤 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에서는 철자 ch가 보통 파찰음 /ʧ/를 나타낸다. 물론 aching [ˈeɪ̯k.ɪŋ] 에이킹, anarchist [ˈæn.əɹ.kɪst, -ɑːɹ-] 애너키스트/애나키스트, masochism [ˈmæs.ə.ˌkɪz.əm, ˈmæz-] 매서키즘/매저키즘, parochial [pə.ˈɹoʊ̯.ki‿əl] 퍼로키얼 같은 단어에서 ch가 폐쇄음 /k/로 발음될 뿐만이 아니라 Czech [ˈʧɛk] 과 Czechoslovakia [ˌʧɛk.oʊ̯.sloʊ̯.ˈvæk.i‿ə, -vɑːk-] 체코슬로배키아/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ch가 /k/로 발음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Czechia라는 낯선 단어에서도 ch가 /k/로 발음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한데 그래도 이게 어려운 이들이 있나보다.

하지만 체코 정부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 영어에서 Czechia라는 이름이 정착된다면 발음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영어는 철자와 발음의 관계가 워낙 느슨해서 [ˈʧɛk.i‿ə] 체키아라는 발음이 익숙해지면 Czechia라는 철자를 보고 자연히 올바른 발음을 연상시키실 수 있을 것이다. 영어 화자들이 철자만 봐서는 짐작하기 힘든 Czech과 Czechoslovakia의 올바른 발음을 문제없이 배웠듯이 Czechia도 익숙해지면 올바르게 발음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발음하기만 한다면 영어에서 Czechia와 Chechnya가 혼동될 염려는 별로 없다.

Czechia를 반대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이 이름은 결국 보헤미아의 체코어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보헤미아 외 다른 지방 사람들 가운데는 이 이름이 보헤미아만이 체코의 전부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이들은 보통 체코어 Cěsko 체스코라는 이름에도 부정적이다). 이들은 대체로 the Czechlands 더 체클런즈 같이 적어도 여러 지방이 합친 나라라는 것을 나타내는 복수형 이름을 선호한다. 아예 Czechomoravia [ˌʧɛk.oʊ̯.mə.ˈɹeɪ̯v.i‿ə, -mɒ-] 체코모레이비아 즉 ‘체코모라비아’ 같이 나라 이름에 모라비아를 포함시키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 체코령 실레시아까지 더해 Czechomoravosilesia [ˌʧɛk.oʊ̯.mə.ˌɹeɪ̯v.oʊ̯.saɪ̯.ˈliːz.i‿ə, -mɒ-, -sɪ-, -ˈliːʒ.ə, ˈliːʃ.ə] 체코모레이보사일리지아/체코모레이보실리샤/… 즉 ‘체코모라보실레시아’까지 가면 거추장스럽게 긴 국명을 짧게 줄이려던 원 의도가 무색해질 테니 이런 제안은 없다.

모라비아와 체코령 실레시아 사람들 입장에서는 불공평한 일일 수 있지만 원래는 보헤미아를 뜻하던 ‘체코’라는 이름이 나라 전체를 대표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한 국가의 주요 지역 하나가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처럼 쓰이는 예는 이 외에도 영국의 잉글랜드(England)와 네덜란드의 홀란트(네덜란드어: Holland [ˈɦɔ.lɑnt])를 들 수 있다. 영어에서는 England 잉글런드/잉런드와 Holland [ˈhɑl.ənd] 홀런드가 각각 영국과 네덜란드 전체를 이르는 이름으로 자주 쓰인다. 나라 전체를 이르는 이름인 the United Kingdom [ðə.ju.ˈnaɪ̯t̬.ᵻd.ˈkɪŋ.dəm] 더 유나이티드 킹덤이나 the Netherlands 더 네덜런즈가 너무 길어서 이렇게 부르는 일이 많지만 타 지방 출신의 영국인이나 네덜란드인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 한자식 이름인 영국(英國)과 화란(和蘭)도 각각 잉글랜드와 홀란트에서 따왔지만 나라 전체를 이른다.

‘체코’의 한글 표기

지금까지 Czechia 체키아, the Czech Republic 더 첵 리퍼블릭 등의 영어 이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한글 표기는 어떤가? ‘체코’라는 현 표기를 ‘체키아’로 바꿀 필요가 있을까?

일단 영어에서 the Czech Republic 대신 Czechia라고 불러달라고 체코 정부가 요청한 이유는 한국어에 해당 사항이 없다. 한국어에서는 이미 정식 국명인 ‘체코 공화국’ 대신 약식 국명 ‘체코’가 널리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외국어를 번역한 글에서 다른 나라는 약식 국명으로 부르면서 체코만 불필요하게 ‘체코 공화국’으로 쓰는 경우도 종종 본다. 영어에서 약식 국명 Czechia가 널리 퍼진다면 이런 경우도 줄어들 것이다.

‘체코’라는 현 표기가 언어학적으로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영어 Czech + -o- + slovak + -ia = Czechoslovakia를 ‘체코슬로바키아’로 표기해왔는데 둘이 분리되자 이를 단순히 ‘체코’ + ‘슬로바키아’로 분석해서 ‘체코’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일본어에서도 チェコ Cheko [ʨe.ꜜko] 체코로 부른다. 예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에도 한국어에서는 그냥 ‘체코’로 줄여 부르는 일이 흔했다.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영어에서 Czecho-, 즉 Czech + -o-는 뒤에 따르는 말이 있을 때의 연결형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나라 이름이 아니다.

그러니 접요사 -o-를 떼고 영어의 형용사형 Czech만 옮겨 ‘체크’로 쓰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Czech [ˈʧɛk]은 ‘체크’가 아니라 ‘첵’으로 쓰는 것이 맞다. 영어의 표기에서 짧은 모음을 따르는 어말 무성 파열음은 받침으로 적도록 하고 있으니 ‘첵’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영어에서 Czech와 발음이 완전히 똑같은 동음이의어인 check에 해당하는 외래어는 ‘첵’이 아니라 ‘출석 체크’, ‘체크 무늬’ 등으로 쓰이는 ‘체크’이다. 영어에서 오래 전에 들어온 외래어 가운데 짧은 모음을 따르는 어말 무성 파열음을 받침으로 적었을 때 한국어에서 한 음절이 되는 경우 받침 대신 ‘으’를 붙여 적는 경향이 있다. hit [ˈhɪt]  ‘히트’, mat [ˈmæt]  ‘매트’, set [ˈsɛt]  ‘세트’ 등 어말 자음이 /t/일 때 이런 경향이 특히 심하지만 check [ˈʧɛk]  ‘체크’, knock [ˈnɒk]  ‘노크’, shock [ˈʃɒk]  ‘쇼크’ 등 어말 자음이 /k/일 때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체크’라는 형태가 익숙하니 철자는 다르지만 영어 발음이 같은 Czech도 그렇게 적고 싶어지는 것인데 외래어 표기 원칙에는 맞지 않으니 권장할만한 표기는 아니다. 한편 외래어 표기법에서 다른 대부분의 언어 표기에서는 짧은 모음을 따르는 어말 무성 파열음도 ‘으’를 붙여 적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프랑스어의 Tchèque [tʃɛkə]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체크’가 맞다.

만약 Czech의 어원인 체코어의 Čech [ˈʧɛx] 또는 폴란드어의 Czech [ˈʦ̢ɛx]를 한글 표기 기준으로 삼는다면 ‘체흐’이다. 하지만 이는 나라 이름이 아니라 ‘체코 사람’을 뜻하니 나라 이름의 표기 기준으로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스위스’를 ‘스위스의’를 뜻하는 형용사이자 ‘스위스 사람’을 뜻하는 명사인 영어의 Swiss [ˈswɪs] 스위스에서 온 표기로 본다면 ‘체흐’도 비슷한 예로 볼 수 있다(하지만 영어 Swiss의 어원인 프랑스어의 Suisse [ˈsɥisə] 쉬이스/쉬스는 나라 이름으로도 쓰인다). 체코어 이름에 따라 적으려면 나라 이름인 Česko [ˈʧɛ.sko]를 기준으로 ‘체스코’로 적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어와 체코어에서 쓰는 나라 이름 Slovensko의 슬로바키아어 발음 [ˈslo.ʋen.sko] 또는 체코어 발음 [ˈslo.vɛn.sko] 에 따라 ‘슬로벤스코’로 쓰지 않으면서 체코는 ‘체스코’로 쓰는 것도 형평에 맞지 않는다.

사실 슬로바키아 말고도 체코 주변 나라들 가운데 현지 언어 이름에 따라 불러주는 곳은 없다. 독일은 그나마 독일어 이름인 Deutschland [ˈdɔʏ̯ʧ.lant]에 따른 ‘도이칠란트’가 별칭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려있지만 실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독일어 이름은 Österreich [ˈøːs.tə.ʁaɪ̯ç, -tɐ-] 외스테라이히/외스터라이히, 폴란드의 폴란드어 이름은 Polska [ˈpɔl.ska] 폴스카, 헝가리의 헝가리어 이름은 Magyarország [ˈmɒ.ɟɒ.ror.saːɡ] 머저로르사그이다. 참고로 현지어 발음에 따른 표기를 원칙으로 내세우는 북한 문화어는 체코를 ‘체스꼬’, 슬로바키아를 ‘슬로벤스꼬’라 쓰며 독일을 ‘도이췰란드’, 폴란드를 ‘뽈스까’, 헝가리를 형용사형 및 민족명 magyar [ˈmɒ.ɟɒr] 머저르에 따라 ‘마쟈르’로 쓰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오스트리아는 남한 표준어와 똑같이 ‘오스트리아’라고 한다. 1998년 이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도이췰란드’와 ‘오스트리아’ 대신 한자 음차 표기인 ‘독일(獨逸)’과 ‘오지리(墺地利)’를 썼고 헝가리를 ‘마쟈르’ 대신 러시아어의 Венгрия Vengriya [ˈvʲen.ɡrʲɪ.jə] 벤그리야를 따른 ‘웽그리아’로 썼다.

그 외에도 유럽 중동부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은 현지어 이름인 Hrvatska [xř̩.ʋaːt.skaː] 흐르바츠카, Србија / Srbija [sř̩.bi.ja] 스르비야, Lietuva [lʲɪɛ.tʊ.ˈvɐ] 리에투바, Eesti [ˈeːs.ti] 에스티가 아니라 영어에서 쓰는 형태인 Croatia, Serbia, Lithuania, Estonia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영어 발음에 따라 적으면 각각 [kɹoʊ̯.ˈeɪ̯ʃ.ə] ‘크로에이샤’, [ˈsɜːɹb.i‿ə] ‘서비아’, [ˌlɪθ.ju.ˈeɪ̯n.i‿ə, -u-] ‘리슈에이니아/리수에이니아’, [ɛ.ˈstoʊ̯n.i‿ə, ᵻ-] ‘에스토니아/이스토니아’이니 영어 발음에 따른 표기가 아니라 국제적인 라틴어식 발음에 따른 표기, 즉 a를 ‘아’로 적고 e를 ‘에’로 적는 방식을 따랐다. 참고로 현재 라틴어에서 쓰는 형태는 Croatia, Serbia, Lituania 또는 Lithuania, Estonia 또는 Esthonia로 t와 th의 교체 같은 미세한 차이를 제외하면 영어에서 쓰는 형태와 일치하며 한국어에서 쓰는 형태도 라틴어 이름에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한 것과 일치한다(물론 오늘날 라틴어를 모어로 쓰는 화자는 없지만 오늘날에도 바티칸 시국 등에서 여전히 쓰고 있기 때문에 고전 라틴어 시대에는 없던 현대의 나라 이름도 라틴어 형태가 있다).

그러면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라틴어 이름은 무엇일까? 체코는 이탈리아어와 형태가 같은 Cechia로 쓰거나 Czechia로 쓰며 슬로바키아는 Slovacia 또는 Slovakia로 쓴다. 체코의 영어 약식 국명으로 Czechia가 많은 지지를 얻은 이유 가운데 하나도 라틴어 형태에 가깝다는 것이다. Czechia라는 라틴어 표기는 이미 1634에도 쓴 예가 있다고 한다. 영어에서 Czechia가 처음 쓰인 것은 1841년이다.

그런데 Cechia에 고전 라틴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케키아(×)’, Slovacia 또는 Slovakia는 ‘슬로바키아(×)’이다(Czechia는 ‘크제키아(×)’ 정도로 적을 수도 있겠지만 cz는 고전 라틴어에 나오는 조합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 이름에 고전 라틴어 표기법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외래어 표기 용례의 표기 원칙에 포함된 라틴어 표기 원칙은 로마 시대의 고전 라틴어 표기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라틴어의 표기에 적용하려면 약간의 변화가 필요하다. Croatia, Serbia 등 앞에서 예를 든 라틴어 이름에는 고전 라틴어 표기법을 적용해도 문제가 없지만 Cechia/Czechia와 Slovacia는 전설 모음인 i, e 앞에 나오는 c 때문에 고전 라틴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현대 라틴어 발음과 큰 차이가 생긴다.

고전 라틴어에서 c는 언제나 폐쇄음 /k/를 나타냈다. 그런데 속라틴어에서 일어난 발음의 변화로 로망어군에서는 i, e 등 전설 모음 앞의 c가 파찰음(예: 이탈리아어와 루마니아어의 /ʧ/) 내지는 마찰음(예: 프랑스어와 포르투갈어, 라틴 아메리카 에스파냐어의 /s/, 카스티야 에스파냐어의 /θ/)으로 발음이 바뀌었다. 로마 교황청에서 쓰는 교회 라틴어는 이탈리아어식 발음을 따르기 때문에 전설 모음 앞의 c를 /ʧ/로 발음한다. 다른 언어에서도 라틴어의 발음이 바뀌어서 전설 모음 앞의 c를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은 영어는 /s/로, 독일어와 슬라브어 대부분은 파찰음 /ʦ/로 발음하게 되었다.

Cechia를 고전 라틴어식 발음에 따라 적으면 ‘케키아(×)’이지만 이 이름이 출현한 것은 이미 전설 모음 앞의 c가 파찰음이나 마찰음으로 바뀐지 한참 후이니 그렇게 적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Cechia의 교회 라틴어 발음은 이탈리아어와 마찬가지로 [ˈʧɛː.kja] ‘체키아’이다. 그런데 Czechia의 발음은 약간 더 복잡하다. 체코어 옛 철자에서 cz가 파찰음 /ʧ/를 나타낸 것을 감안하면 Czechia에서도 /ʧ/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Cechia 대신 굳이 라틴어에서 잘 안 쓰는 cz 조합을 써서까지 Czechia로 썼을까? 현대 라틴어 발음 가운데는 이탈리아어식 교회 라틴어 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슬라브어권에서는 Cechia라고만 쓰면 첫 자음이 파찰음 /ʧ/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음소인 /ʦ/로 발음되기 때문에 일부러 Czechia로 쓴 것이다. 그런데 슬라브어권에서는 고전 라틴어에서 유기 폐쇄음 /kʰ/를 나타냈고 교회 라틴어에서는 폐쇄음 /k/를 나타내는 ch를 마찰음 /x/로 발음한다. 그러니 Czechia의 슬라브어권식 현대 라틴어 발음은 [ˈʧɛ.xi.ja] 체히아로 볼 수 있다. 즉 체코어의 Čech [ˈʧɛx](옛 철자 Czech)에 라틴어 -ia를 붙인 형태이다. 독일어 이름 Tschechien [ˈʧɛ.çi̯ən] 체히엔에서도 마찰음 음소 /x/의 변이음인 [ç]가 쓰인다. 즉 현대 라틴어 발음에 따른 Cechia의 표기는 ‘체키아’, Czechia의 표기는 ‘체히아’로 각각 이탈리아어 표기법, 폴란드어 표기법을 적용한 것과 같다(옛 철자 Czechia 대신 Čechia로 쓴다면 체코어 표기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과도 같다). 이 가운데 고르라면 아무래도 기존의 ‘체코’와 더 가깝고 영어 발음에 따른 Czechia의 표기와도 일치하는 ‘체키아’가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Slovacia는 교회 라틴어에서 [zlo.ˈvaː.ʧja] 슬로바치아로 발음된다. 즉 루마니아어의 Slovacia [slo.ˈva.ʧja] 슬로바치아, 폴란드어의 Słowacja [swɔ.ˈva.ʦja] 스워바치아/스워바차에서처럼 파찰음 발음이 쓰이는 것이다. Slovacia를 굳이 고전 라틴어에서는 쓰지 않던 그리스어식 글자인 k를 써서 Slovakia로 쓰기도 하는 것은 [zlo.ˈvaː.kja] 슬로바키아로 폐쇄음 /k/ 발음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Slovacia에 고전 라틴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슬로바키아’로 한국어에서 쓰는 형태와 일치하지만 이것은 우연일 뿐이다.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라틴어 이름은 Slovacia가 아니라 Slovakia이다. 그러니 슬로바키아를 라틴어 이름에 따라 적으려면 ‘슬로바치아(Slovacia)’와 ‘슬로바키아(Slovakia)’ 가운데서 고르면 된다. 영어 및 다른 언어에서 폐쇄음 /k/ 발음이 우세하니 ‘슬로바키아’로 쓰는 것이 합리적이다.

유럽 중동부 나라 이름을 보면 불가리아(Bulgaria), 크로아티아(Croatia), 에스토니아(Estonia/Esthonia), 리투아니아(Lituania/Lithuania), 세르비아(Serbia), 슬로베니아(Slovenia) 등이 현지어 이름 아닌 라틴어 이름을 따른 것과 한글 표기가 일치한다. 우크라이나(Ucraina)도 라틴어 이름을 따른 것과 한글 표기가 같은데 이것은 라틴어에서 우크라이나어명인 Україна Ukrayina [u.krɑ.ˈji.nɑ] 우크라이나 또는 러시아어명인 Украина Ukraina [ʊ.krɐ.ˈji.nə] 우크라이나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참고로 영어로는 Ukraine [ju.ˈkreɪ̯n] 유크레인이다). 적어도 유럽에서는 나라 이름의 경우 다른 여러 언어에서도 보통 라틴어 이름에 가깝게 부르는 일이 많으므로 라틴어 이름을 기준으로 표기하면 여러 언어에서 쓰는 형태와 가까워진다는 장점이 있다. 현지어명 Česko를 따른 표기 ‘체스코’는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빼고는 들어맞는 언어가 거의 없지만 약식 국명으로 따지면 영어 Czechia·이탈리아어 Cechia·에스파냐어 Chequia가 모두 Cechia의 현대 라틴어식 표기와 같은 ‘체키아’로 표기되며 리투아니아어 Čekija의 표기인 ‘체키야’, 프랑스어 Tchéquie와 핀란드어 Tšekki의 표기인 ‘체키’, 루마니아어 Cehia와 그리스어 Τσεχία Tsekhía의 표기인 ‘체히아’, 러시아어와 불가리아어의 Чехия Chekhiya·우크라이나어 Чехія Chekhiya·벨라루스어 Чэхія Chekhiya·라트비아어 Čehija의 표기인 ‘체히야’ 등도 ‘체스코’보다는 ‘체키아’에 더 가깝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처음 분리되었을 때에 체코의 한글 표기를 심의했더라면 ‘체키아’가 가장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처음부터 Czechia 체키아라는 약식 국명이 널리 알려져 ‘체키아’로 불렀다면 모를까 체코슬로바키아가 분리된지 13년도 더 지났는데 이제 와서 이미 굳어진 ‘체코’를 ‘체키아’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체코’보다 ‘체키아’가 한 글자가 더 많다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현지어 이름인 ‘에스파냐(España [es.ˈpa.ɲa])’보다 영어 이름인 ‘스페인(Spain [ˈspeɪ̯n])’이 더 많이 쓰이고 현지 공용어 가운데 하나인 영어 이름인 ‘인디아(India [ˈɪnd.i‿ə])’보다 한자 음차 표기인 ‘인도(印度)’가 훨씬 더 많이 쓰이는 것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예전에 쓰던 표기가 글자 수가 더 적어 언중이 바꾸기를 꺼렸다는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해당 정부의 요청으로 ‘그루지야’, ‘벨로루시’로 쓰던 나라 이름을 ‘조지아’, ‘벨라루스’로 바꾼 적이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the Czech Republic을 Czechia로 바꾸자는 것은 영어 이름 및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처럼 약식 국명 대신 번거로운 정식 국명을 쓰는 언어를 대상으로 한 요청이므로 ‘체코 공화국’ 대신 ‘체코’로 잘 부르고 있는 한국어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부르군디아(부르고뉴/부르군트) 이야기

이보다 더 많은 혼란을 초래해왔으며 지금도 계속 혼란을 초래하는 지명은 대기 어려울 것이다.
It would be hard to mention any geographical name which … has caused, and continues to cause, more confusion.

영국의 정치인이자 역사가인 제임스 브라이스(영어: James Bryce [ˈʤeɪ̯mz.ˈbɹaɪ̯s], 1838년~1922년)가 1862년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을 쓰면서 특별히 단 주 “On the Burgundies (부르군디아들에 관해)”에 나오는 말이다. 영어로 버건디(Burgundy [ˈbɜːɹɡ.ənd.i])로 불리고 프랑스어로 부르고뉴(Bourgogne [buʁ.ɡɔɲə]) 또는 역사 지명에 한정하여 뷔르공디(Burgondie [byʁ.ɡɔ̃.di]), 독일어로 부르군트(Burgund [bʊʁ.ˈɡʊnt]), 이탈리아어로 보르고냐(Borgogna [bor.ˈɡoɲ.ɲa]), 네덜란드어로 부르혼디어(Bourgondië [bur.ˈɣɔn.di.jə]) 등으로 불리는 지명을 두고 한 말이다. 본 글에서는 르네상스(프랑스어: Renaissance [ʁə.nɛ.sɑ̃ːsə]) 시대까지는 라틴어 이름이자 다른 이름들의 어원인 부르군디아(Burgundia)로 통일하고 근대 이후로는 각각의 경우에 맞게 프랑스어 이름인 부르고뉴와 독일어 이름인 부르군트를 쓰도록 한다.

브라이스의 글은 영국의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영어: Norman Davies [ˈnɔːɹm.ən.ˈdeɪ̯v.ᵻs], 1939년생)의 2011년작 Vanished Kingdoms: The History of Half-Forgotten Europe (사라진 왕국들: 반쯤 잊혀진 유럽의 역사) 가운데 제3단원 “Burgundia: Five, Six or Seven Kingdoms (c. 411–1795) (부르군디아: 다섯 혹은 여섯, 일곱 개의 왕국(411년경~1795년))”에 인용되었다. 이 책은 제1단원에서 5세기에 서고트족(라틴어: Visigothi 비시고티)이 지금의 프랑스 남부에 세운 톨로사(라틴어: Tolosa) 왕국으로부터 시작하여 1991년 해체된 마지막 제15단원의 소련까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다루었는데 848쪽이나 되는 적지 않은 분량에 난해한 역사 지명과 인명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탓에 조만간 한국어 번역을 접하기는 힘들 듯하다.

브라이스는 “On the Burgundies”에서 부르군디아로 불린 적이 있는 나라 또는 행정 단위를 열 개나 열거했는데 데이비스는 이것도 너무 짧은 목록이라며 부르군디아는 최소 열세 개, 최대 열여섯 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역사적 영토만해도 시기에 따라 오늘날의 독일·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룩셈부르크·벨기에·네덜란드 등에 걸쳐있었다. 지난 글에서 중세의 플랑드르 백작령을 다루면서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등 오늘날의 국가 구분에 딱 들어맞지 않는 중세의 고유명사 표기의 어려움에 대해 얘기했는데 부르군디아는 그보다도 심한 셈이다.

오늘날 부르고뉴는 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한 프랑스의 중동부의 레지옹(프랑스어: région [ʁe.ʒjɔ̃], 지방 행정 구역 최상위 단위) 이름 정도로만 보통 알고 있다. 그런데 데이비스는 부르군디아에 관한 단원을 엉뚱하게도 발트 해 스웨덴 연안의 덴마크령 섬인 ‘발트 해의 진주’ 보른홀름(덴마크어: Bornholm [b̥ɒn.ˈhʌlˀm])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때 덴마크에 속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최남단이 스웨덴에게로 넘어가면서 덴마크령으로 남은 보른홀름 섬은 덴마크 본토보다는 스웨덴에 더 가까워졌는데 여담으로 현지 방언인 보른홀름어(덴마크어: Bornholmsk [b̥ɒn.ˈhʌlˀmsɡ̊] 보른홀름스크)는 표준 덴마크어나 스웨덴어와 상당한 차이가 있어 언어학적 관점에서 흥미를 끈다.

보른홀름의 고대 노르드어 이름은 부르군다홀므르(Burgundaholmr)였다. 책에는 *Burgundarholm으로 나왔는데 이는 다른 저자들도 많이 쓰지만 잘못으로 보인다. 주격어미 -r를 생략하더라도 Burgundaholm이어야 한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홀므르(holmr)는 ‘작은 섬’을 뜻한다. 여기서 주격어미 -r만 떨어져나간 현대 덴마크어의 홀름(holm [ˈhʌlˀm])도 같은 뜻이다. 부르군다(Burgunda)는 ‘부르군트족 사람’을 뜻하는 부르군드르(Burgundr)의 복수 속격형으로 부르군다홀므르는 ‘부르군트족 사람들의 작은 섬’, 즉 ‘부르군트족의 섬’을 뜻하는 셈이다. 종족을 가리킬 때는 복수 주격형인 부르군다르(Burgundar)를 쓰는데 *Burgundarholm으로 쓰는 이들은 이 때문에 헷갈린 듯하다.

참고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쓰는 용어인 ‘부르군트족’은 지명인 부르군디아의 독일어 형태인 부르군트에 족(族)을 붙인 것이다. 부족 이름인 부르군트족은 독일어로 부르군더(Burgunder [bʊʁ.ˈɡʊn.dɐ])라고 한다. 프랑스어로는 뷔르공드(Burgondes [byʁ.ɡɔ̃ːdə]), 라틴어로는 부르군디이(Burgundii) 또는 부르군디오네스(Burgundiones), 영어로는 버건즈(Burgunds [ˈbɜːɹɡ.əndz]) 또는 버건디언스(Burgundians [bəɹ.ˈɡʌnd.i‿ənz, bɜːɹ-])라고 한다. 모두 부르군드(Burgund)와 비슷한 어근 또는 거기서 파생된 형용사형에 복수 어미를 붙인 형태이다. 독일이 생기기 훨씬 전에 유럽 전역을 떠돈 부족이라 특별히 독일어 형태를 쓸 이유가 없으니 그냥 ‘부르군드족’이라고 했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부르군디아라는 지명은 부르군트족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들은 로마 제국을 위협한 게르만 부족 가운데 하나로 자세한 여정은 파악하기 힘들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 남하하여 오늘날의 폴란드를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발트 해를 건너면서 보른홀름 섬에 잠시라도 머물렀기 때문에 ‘부르군트족의 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부르군트족의 언어인 부르군트어는 역시 북유럽 출신인 고트족의 언어 고트어처럼 동게르만어군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료가 부족해 확실하지는 않다. 이들이 쓴 이름들을 봐서는 게르만어계 언어인 것만은 확실하다. 부르군트족의 지도자 이름에 흔히 등장하는 gund-는 ‘싸움, 전투’를 뜻하는 게르만어계 어근이며 이를테면 군도바드(Gundobad, 라틴어: Gundobadus 군도바두스)는 ‘싸움에서 용감한’, 군도마르(Gundomar, 라틴어: Gundomarus 군도마루스)는 ‘싸움으로 이름난’으로 해석할 수 있다(참고로 본 글에서는 부르군트족 인명의 표기는 라틴어에서 격어미 -us 등을 뗀 형태를 기준으로 한다).

데이비스가 열거한 열다섯 개의 부르군디아는 다음과 같다.

  1. 410년~436년: 군다하르의 부르군디아 제1왕국
  2. 451년~534년: 군디오크의 부르군디아 제2왕국
  3. 590년경~734년: 프랑크 왕국의 부르군디아 제3왕국
  4. 843년~1384년: 프랑스의 부르군디아 공작령
  5. 879년~933년: 저지 부르군디아 왕국
  6. 888년~933년: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
  7. 933년~1032년: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아를 왕국)
  8. 1000년경~1678년: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자유백작령(프랑슈콩테)
  9. 1032년~?: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왕국
  10. 1127년~1218년: 신성 로마 제국의 소(小)부르군디아 공작령
  11. 11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방백령
  12. 1384년~1477년: 부르군디아 결합국
  13. 1477년~1791년: 프랑스의 부르고뉴 주
  14. 1548년~1795년: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트 제국권
  15. 1982년~: 프랑스의 부르고뉴 레지옹

데이비스가 쓴 단원의 내용을 간추려 부르군디아의 복잡한 역사를 소개한다.

군다하르의 부르군디아 제1왕국(410년~436년)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부르군디아는 군다하르(Gundahar, 라틴어: Gundaharius 군다하리우스 또는 Gundicharius 군디카리우스 또는 Guntharius 군타리우스독일어: Gundahar [ˈɡʊn.da.haʁ] 군다하르 또는 Gundikar [ˈɡʊn.di.kaʁ] 군디카르프랑스어: Gondicaire [ɡɔ̃.di.kɛːʁə] 공디케르 또는 Gonthaire [ɡɔ̃.tɛːʁə] 공테르 또는 Gonthier [ɡɔ̃.tje] 공티에)라는 부르군트족 지도자가 410년 라인 강 중류의 서쪽 유역에 세운 왕국이다. 수도는 옛 켈트족(라틴어: Celtae 켈타이) 정착촌이었던 보르베토마구스(라틴어: Borbetomagus,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 보름스 독일어: Worms [ˈvɔʁms])로 삼았으며 영토는 남쪽으로 노비오마구스(라틴어: Noviomagus,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 슈파이어 독일어: Speyer [ˈʃpaɪ̯.ɐ])와 아르겐토라툼(라틴어: Argentoratum,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 스트라스부르 프랑스어: Strasbourg [stʁas.buːʁ])까지 뻗었다.

그 당시 이 지역은 로마 제국의 갈리아(라틴어: Gallia) 주의 일부였다. 갈리아 주는 오늘날의 독일의 라인 강 서쪽 부분을 비롯하여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스위스 대부분, 네덜란드 일부 등에 해당했으며 원래 켈트족의 땅이었는데 4세기 무렵 시작된 민족의 대이동으로 부르군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들이 들어와 갈리아인, 즉 로마화한 켈트족 사이에 살고 있었다.

군다하르는 알란족(라틴어: Alani 알라니)의 지도자 고아르(Goar, 라틴어: Goarus 고아루스)와 함께 현지의 갈리아인 원로원 의원 요비누스(라틴어: Jovinus)가 로마에 반기를 들고 모군티아쿰(라틴어: Moguntiacum,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 마인츠 독일어: Mainz [ˈmaɪ̯nʦ])에서 자칭 로마 황제로 옹립되는 것을 도왔다. 이 대가로 요비누스는 부르군트족을 로마의 동맹자(라틴어: Foederatus 포이데라투스)로 선포하였으며 군다하르는 명목상 로마 제국이 다스리는 땅에 부르군트족의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군다하르와 고아르가 세운 꼭두각시 황제 요비누스는 2년 만에 죽임을 당했고 평정을 되찾은 로마 조정은 군다하르도 제거하려고 뜻을 굳혔다. 그래서 부르군디아 제1왕국도 20여년 밖에 더 버티지 못했다. 436년 로마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라틴어: Flavius Aëtius) 장군이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목표로 아틸라(라틴어: Attila)가 이끄는 훈족(라틴어: Hunni 훈니)을 불러들여 부르군디아 왕국을 멸망시키게 한 것이다.

부르군트족 2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전하는 이 사건은 전설을 넘어 게르만족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군다하르는 북유럽 신화의 《볼숭그르 일족의 사가(고대 노르드어: Vǫlsunga saga 불숭가 사가)》에서는 군나르(고대 노르드어: Gunnarr)로, 독일의 《니벨룽의 노래(독일어: Nibelungenlied [ˈniː.bə.lʊŋ.ən.ˌliːt] 니벨룽겐리트)》에는 군터(독일어: Gunter [ˈɡʊn.tɐ])로 등장한다.

군디오크의 부르군디아 제2왕국(451년~534년)

제1왕국의 멸망 후 살아남은 부르군트족의 일부는 훈족 밑에, 일부는 로마 밑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부르군디아 제1왕국을 멸망시킬 때에는 같은 편이었던 로마와 훈족은 451년의 카탈라우눔(라틴어: Catalaunum) 평원 전투에서 서로 맞붙었는데 이때 양 진영에 부르군트족 병사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작전상 승리로 이끈 아에티우스는 군디오크(Gundioch, 라틴어: Gundiochus 군디오쿠스 또는 Gundevechus 군데베쿠스독일어: Gundioch [ˈɡʊn.di̯ɔx] 군디오흐 또는 Gundowech [ˈɡʊn.do.vɛç] 군도베히프랑스어: Gondioc [ɡɔ̃.djɔk] 공디오크)라는 로마 진영의 부르군트족 지도자에게 알프스 지방의 사파우디아(라틴어: Sapaudia 또는 Sabaudia 사바우디아)라는 곳에 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아마도 부르군트족이 이미 이 지역으로 터전을 옮긴 후였을 것이다). 사파우디아는 훗날 프랑스어로 사부아(Savoie [sa.vwa]), 이탈리아어로 사보이아(Savoia [sa.ˈvɔ.ja])로 알려지게 되는 지명의 어원이다. 이것이 제2 부르군디아이다.

게나바(라틴어: Genava, 오늘날의 스위스 서부 제네바 프랑스어: Genève [ʒə.nɛːvə] 주네브)를 중심으로 출발한 부르군디아 제2왕국은 곧 아루스 강(Arus, 오늘날의 손 강 프랑스어: Saône [soːnə])과 로다누스 강(Rhodanus, 오늘날의 론 강 프랑스어: Rhône [ʁoːnə])이 만나는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그리하여 10년 이내에 루그두눔(라틴어: Lugdunum,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리옹 프랑스어: Lyon [ljɔ̃]), 디비오(라틴어: Divio,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디종 Dijon [di.ʒɔ̃]), 베손티오(라틴어: Vesontio,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브장송 Besançon [bə.zɑ̃.sɔ̃]) 등이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부르군디아 제2왕국은 5대를 이어갔으나 내부 분열로 약해지고 6세기초 계속된 전쟁 끝에 제5대 군도마르(Gundomar, 라틴어: Gundomarus 군도마루스 또는 Gundimarus 군디마루스 또는 Godomarus 고도마루스독일어: Godomar [ˈɡoː.do.maʁ] 고도마르프랑스어: Gondemar [ɡɔ̃də.maːʁ] 공드마르)왕 때인 534년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한 프랑크 왕국에 패배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크 왕국의 부르군디아 제3왕국(590년~734년)

프랑크족(라틴어: Franci 프랑키, 프랑스어: Francs [fʁɑ̃] 프랑독일어: Franken [ˈfʁaŋ.kn̩] 프랑켄, 네덜란드어: Franken [ˈfraŋ.kən] 프랑컨)은 라인 강 중하류에서 처음 역사에 등장한 서게르만의 일파이다. 클로비스(프랑스어: Clovis [klɔ.vis], 라틴어: Chlodovechus 클로도베쿠스, 독일어: Chlodwig [ˈkloːt.vɪç] 클로트비히, 네덜란드어: Clovis [ˈkloː.vɪs] 클로비스, 재위 481년~511년)라는 지도자가 최초로 모든 프랑크족의 소왕국들을 통일하여 파리시우스(라틴어: Parisius,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파리 프랑스어: Paris [pa.ʁi])를 수도로 하는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메로빙거(독일어: Merowinger [ˈmeː.ʁo.vɪŋ.ɐ]라틴어: Merovingi 메로빙기프랑스어: Mérovingiens [me.ʁɔ.vɛ̃.ʒjɛ̃] 메로뱅지앵네덜란드어: Merovingen [me.ˈroː.vɪŋ.ən] 메로빙언) 왕조의 창시자가 되었다. 클로비스는 부르군디아 제2왕국의 왕녀 클로틸드(프랑스어: Clotilde [klɔ.tildə], 라틴어: Clotildis 클로틸디스, 독일어: Clothilde [klo.ˈtɪl.də] 클로틸데, 네덜란드어: Clothilde [klo.ˈtɪl.də] 클로틸더)를 둘째 아내로 맞았는데 클로틸드는 남편을 설득시켜 가톨릭교로 개종하게 하였다. 이때까지만해도 프랑크족과 서고트족을 비롯한 갈리아 지역의 게르만족 대부분은 325년의 제1차 니케아(라틴어: Nicaea 니카이아, 오늘날의 터키 서북부 이즈니크 터키어: İznik [ˈiz.nik])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된 아리우스(라틴어: Arius, 336년 사망)의 가르침을 따른 아리우스파(라틴어: Ariani) 기독교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클로비스의 개종은 후에 가톨릭교가 서유럽을 지배하는 계기가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부르군디아 궁정에도 아리우스파가 많았지만 클로틸드는 가톨릭교인으로 자라났다.

클로틸드는 클로비스가 죽은 후에도 아들들을 부추겨 부르군디아 제2왕국을 멸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부르군디아의 왕이었던 클로틸드의 아버지 킬페리크(Chilperic, 라틴어: Chilpericus 킬페리쿠스독일어: Chilperich [ˈçɪl.pə.ʁɪç] 힐페리히프랑스어: Chilpéric [ʃil.pe.ʁik] 실페리크)는 공동 왕이었던 동생 군도바드(Gundobad, 라틴어: Gundobadus 군도바두스독일어: Gundobad [ˈɡʊn.do.bat] 군도바트프랑스어: Gondebaud [ɡɔ̃də.bo] 공드보)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클로틸드는 아들들을 통해 이 원한를 갚으려 한 것이다.

프랑크족은 원래 서게르만어계 언어인 프랑크어를 썼지만 문자 생활은 보통 당시의 국제어인 라틴어로 했기 때문에 기록상으로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프랑크어는 표준화되지 않았다. 북해 인근의 저지대에서 쓴 프랑크어 방언은 후에 네덜란드어의 뿌리가 되며 라인 강 유역의 프랑크어 방언들은 오늘날에는 국경에 따라 독일어의 방언이나 네덜란드어의 방언으로 간주되는 여러 방언들의 뿌리가 된다. 이 가운데 룩셈부르크에서 쓰이는 방언은 20세기에야 뒤늦게 룩셈부르크어로 표준화되어 1984년 프랑스어와 독일어와 함께 공용어의 지휘를 획득한다. 표준 독일어는 오늘날의 독일 중부 지역의 비(非)프랑크어계 고지 독일어 방언들이 원 토대가 되었지만 이웃하는 프랑크어계 방언들의 영향도 꽤 받았다.

한편 수도 파리를 비롯한 서쪽의 프랑크족은 프랑크어를 잊고 갈리아 지방의 통속 라틴어를 쓰게 되는데 이는 고대 프랑스어로 이어진다. 그래서 프랑스어는 어휘나 문법, 발음에서 프랑크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 때문에 같은 라틴어에서 나왔으면서도 이탈리아어나 에스파냐어 같은 다른 로망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실린 프랑크 왕국과 관련된 이름들은 메로빙거, 카롤링거처럼 독일어 형태나 클로비스, 샤를마뉴처럼 프랑스어 형태를 쓴 것이 대부분이다. 본 글에서는 이를 굳이 통일하지 않고 잘 알려진 형태를 따른다.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도 부르군디아라는 영토 단위는 보존되었으며 메로빙거 왕들은 스스로 프랑키아와 부르군디아(라틴어: Francia et Burgundia)의 왕 또는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디아(라틴어: Neustria et Burgundia)의 왕으로 칭하고는 했다. 프랑키아는 프랑크족의 땅을 뜻하는 라틴어 이름으로 프랑스(프랑스어: France [fʁɑ̃ːsə])의 어원이며 네우스트리아는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크 왕국 북서부의 옛 이름이다.

클로비스의 손자 중 한 명인 군트람(독일어: Guntram [ˈɡʊn.tʁam], 라틴어: Gontranus 곤트라누스 또는 Gunthramnus 군트람누스 또는 Gunthchramnus 군트크람누스프랑스어: Gontran [ɡɔ̃.tʁɑ̃] 공트랑, 네덜란드어: Gunthram [ˈɣʏn.trɑm] 휜트람, 재위 561년~592년)은 프랑크 왕국 가운데 부르군디아 지역을 물려받고 왕이 되어 부르군디아 왕국(라틴어: Regnum Burgundiae 레그눔 부르군디아이), 즉 부르군디아 제3왕국을 세웠다. 당시 프랑크 왕국에서는 왕이 죽으면 나라를 여러 아들들에게 나누어주는 분할 상속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군트람은 왕국의 일부만 다스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프랑크 왕국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프랑크 왕국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 여러 왕들이 각자의 영토를 다스리는 형태였다. 군트람의 부르군디아 왕국은 전성기인 587년에는 보르도(프랑스어: Bordeaux [bɔʁ.do], 오늘날의 프랑스 서남부), 렌(프랑스어: Rennes [ʁɛnə], 오늘날의 프랑스 서북부), 파리를 포함한 갈리아 대부분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8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궁재이자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샤를 마르텔(프랑스어: Charles Martel [ʃaʁ.lə.maʁ.tɛl]라틴어: Carolus Martellus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독일어: Karl Martel [ˈkaʁl.ˈmaʁ.təl] 카를 마르텔, 네덜란드어: Karel Martel [ˈkaː.rəl.ˈmɑr.təl] 카럴 마르털, 741년 사망)이 프랑크 왕국을 다시 통일하면서 부르군디아 제3왕국은 사라진다.

서프랑크 왕국/프랑스의 부르군디아 공작령(843년~1384년)

샤를 마르텔의 손자 샤를마뉴(프랑스어: Charlemagne [ʃaʁ.lə.maɲə] 샤를르마뉴라틴어: Carolus Magnus 카롤루스 마그누스(=위대한 카롤루스), 독일어: Karl der Große [ˈkaʁl.deːɐ̯.ˈɡʁoː.sə] 카를 데어 그로세(=위대한 카를), 네덜란드어: Karel de Grote [ˈkaː.rəl.də.ˈɣroː.tə] 카럴 더 흐로터(=위대한 카럴), 이탈리아어: Carlo Magno [ˈkar.lo.ˈmaɲ.ɲo] 카를로 마뇨(=위대한 카를로), 814년 사망)는 프랑크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고 로마 교황에 의해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샤를마뉴가 속한 왕조는 샤를 마르텔(카롤루스 마르텔루스)의 후손들이라 해서 카롤링거(독일어: Karolinger [ˈkaː.ʁo.lɪŋ.ɐ]라틴어: Carolingi 카롤링기프랑스어: Carolingiens [ka.ʁɔ.lɛ̃.ʒjɛ̃] 카롤랭지앵네덜란드어: Karolingen [ka.ˈroː.lɪŋ.ən] 카롤링언이탈리아어: carolingi [ka.ro.ˈlin.ʤi] 카롤린지) 왕조라고 한다.

샤를마뉴가 이룩한 제국은 843년에 이르러 그의 세 손자들이 물려받으면서 서프랑크 왕국·중프랑크 왕국·동프랑크 왕국으로 나누어졌다. 서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의 프랑스로 이어지고 동프랑크 왕국은 독일로 이어졌는데 오늘날 중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온전히 간직한 나라는 없다. 그래서 후대의 관점에서는 중프랑크 왕국이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를 차지한 이는 샤를마뉴의 세 손자들 가운데 장남이자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로타르(독일어: Lothar [ˈloː.taʁ]라틴어: Lotharius 로타리우스, 프랑스어: Lothaire [lɔ.tɛːʁə] 로테르네덜란드어: Lotharius [lo.ˈtaː.ri.jʏs, -jəs] 로타리위스, 이탈리아어: Lotario [lo.ˈtaː.rjo] 로타리오795년~855년)였다.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르의 사후 다시 셋으로 나누어졌다. 북해에서 메스(프랑스어: Metz [mɛs],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까지 이르는 북쪽 부분은 로타르의 이름을 따서 로타링기아(라틴어: Lotharingia, 프랑스어: Lotharingie [lɔ.ta.ʁɛ̃.ʒi] 로타랭지독일어: Lothringen [ˈloː.tʁɪŋ.ən] 로트링겐네덜란드어: Lotharingen [ˈloː.tə.ˈrɪŋ.ən] 로타링언)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이 변하여 오늘날의 로렌(프랑스어: Lorraine [lɔ.ʁɛnə],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이 된다. 또 중프랑크 왕국의 남쪽 부분은 이탈리아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로마까지 내려갔다. 나머지 가운데 부분은 대략 부르군디아와 프로방스(프랑스어: Provence [pʁɔ.vɑ̃ːsə], 라틴어: Provincia 프로빙키아, 오늘날의 프랑스 동남부)에 해당되었다.

옛 부르군디아 왕국의 땅은 대부분 로타르의 중프랑크 왕국에 들어갔으나 약 8분의 1 정도인 북서쪽의 손 강 상류 일대가 서프랑크 왕국에 들어갔다. 이 지역에는 군트람 시대에 중심지였던 샬롱(프랑스어: Chalon [ʃa.lɔ̃], 오늘날의 프랑스 동부)이 포함되었으며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처음에는 서프랑크 왕국의 옛 부르군디아 땅에 특별한 지위가 없었으나 880년대에 서프랑크 왕국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부르군디아는 공작령이 되었다. 이게 서프랑크 왕국(후에 프랑스)의 부르군디아 공작령의 시초이다. 오툉(프랑스어: Autun [o.tœ̃], 오늘날의 프랑스 동부) 백작 출신인 판관공 리샤르(프랑스어: Richard le Justicier [ʁi.ʃaʁ.lə.ʒys.ti.sje] 리샤르 르 쥐스티시에라틴어: Richardus Justitiarius 리카르두스 유스티티아리우스, 이탈리아어: Riccardo il Giustiziere [rik.ˈkar.do‿il.ʤus.tit.ˈʦjɛː.re] 리카르도 일 주스티치에레독일어: Richard der Gerichtsherr [ˈʁɪ.çaʁt.deːɐ̯.ɡə.ˈʁɪçʦ.hɛʁ] 리하르트 데어 게리히츠헤어, 850년경~921년)는 이 지역의 변경공으로 봉해졌고 나중에는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리샤르의 후손들이 계속 부르군디아 공작으로 있다가 1004년에 프랑스 왕이 공작령의 직접 지배권을 차지했으며 그 후로는 봉토로 주어지거나 프랑스 왕이 직접 부르군디아 공작위를 맡았다. 편의상 카롤링거 왕조 대신 카페(프랑스어: Capet [ka.pɛ]) 왕조가 다스리기 시작한 987년부터 서프랑크 왕국 대신 프랑스라고 부르기로 한다.

지체가 있었지만 부르군디아 공작령의 행정 중심지는 결국 디종이 되었다.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클뤼니(프랑스어: Cluny [kly.ni]), 시토(프랑스어: Cîteaux [si.to]) 등의 수도원으로도 유명한데 부르군디아 공작령의 수도사들은 고장 특산품인 포도주 생산을 부흥시키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실질적인 독립국처럼 행동했다 하여 부르군디아 공국이라고도 하는데 후에 프랑스 왕의 지배 밑에 들어갔을 때에도 공작령은 존속되었으므로 본 글에서는 구별하지 않고 공작령으로 통일해서 쓴다. 유럽 언어에서는 공국과 공작령의 구별이 없어 예를 들어 라틴어에서는 둘 다 두카투스(ducatus)라고 부른다.

저지 부르군디아 왕국(879년~933년)과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888년~933년)

한편 중프랑크 왕국에 들어간 옛 부르군디아 왕국 땅 가운데 리옹과 비엔(프랑스어: Vienne [vjɛnə]라틴어: Vienna 비엔나, 오늘날의 프랑스 동남부)을 포함한 남쪽과 남서쪽 부분은 프로방스 왕국(라틴어: Regnum Provinciae 레그눔 프로빙키아이)에 합쳐졌다. 그래서 이를 저지 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Inferior 부르군디아 인페리오르) 왕국이라고도 한다. 문화적으로 부르군디아와 프로방스가 반반이었으며 프랑스·프로방스어(프랑스어: franco-provençal [fʁɑ̃.ko.pʁɔ.vɑ̃.sal] 프랑코프로방살이탈리아어: franco-provenzale [fraŋ.ko.pro.ven.ˈʦaː.le] 프랑코프로벤찰레)라는 독특한 언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의 특징을 둘 다 간직하고 있지만 프랑스어 방언도 아니고 프로방스어 방언도 아니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가 혼합된 언어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오늘날에는 아르피타니아어(프랑스어: arpitan [aʁ.pi.tɑ̃] 아르피탕이탈리아어: arpitano [ar.piˈtaː.no] 아르피타노)라는 이름이 힘을 얻고 있다.

행정 중심지는 아렐라테(라틴어: Arelate,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아를 프랑스어: Arles [aʁlə])이었다. 판관공 리샤르의 형인 보종(프랑스어: Boson [bo.zɔ̃, bɔ-]라틴어: Boso 보소이탈리아어: Bosone [bo.ˈzoː.ne] 보소네, 독일어: Boso [boː.zo] 보조, 재위 879년~887년) 백작이 18개월만에 서프랑크 왕국의 왕 두 명이 죽은 혼란기에 현지 주교들과 귀족들을 설득하여 스스로 왕으로 선출된 것이 왕국이 세워진 배경이었다. 저지 부르군디아 왕국의 영토에는 번영하는 론 강 유역의 무역 지대, 또 대륙 내부와 지중해의 주요 출입구가 포함되었다.

얼마 안 가서 옛 부르군디아 왕국 땅의 북동쪽 부분도 왕국이 되었는데 고지 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Superior 부르군디아 수페리오르) 왕국이라고 부른다. 거기서는 오세르(프랑스어: Auxerre [ɔ.sɛːʁə, o-], 오늘날의 프랑스 중북부) 백작의 아들 로돌프(프랑스어: Rodolphe [ʁɔ.dɔlfə]라틴어: Rudolphus 루돌푸스독일어: Rudolf [ˈʁuː.dɔlf] 루돌프이탈리아어: Rodolfo [ro.ˈdɔl.fo, -ˈdol-] 로돌포, 859~912년)가 본거지인 아가우눔(라틴어: Agaunum, 프랑스어: Agaune [a.ɡoːnə] 아곤, 오늘날의 스위스 서남부 생모리스 프랑스어: Saint-Maurice [sɛ̃.mɔ.ʁisə, -mo-])에서 ‘부르군디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의 행정 중심지는 생모리스였고 강역은 오늘날의 스위스 발레(프랑스어: Valais [va.lɛ]) 주, 보(프랑스어: Vaud [vo]) 주, 뇌샤텔(프랑스어: Neuchâtel [nø.ʃɑ.tɛl]), 제네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걸친 사부아/사보이아 지방, 프랑스 남동부의 도피네(프랑스어: Dauphiné [do.fi.ne]) 북부까지 포함했다. 쥐라 산맥(프랑스어: Jura [ʒy.ʁa], 오늘날의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동쪽에 영토 대부분이 있다고 해서 ‘쥐라 저편의 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Transjurensis 부르군디아 트란스유렌시스, 프랑스어: Bourgogne Transjurane [buʁ.ɡɔ.ɲə.tʁɑ̃s.ʒy.ʁanə] 부르고뉴 트랑스쥐란이탈리아어: Borgogna Transgiurana [bor.ˈɡoɲ.ɲa.tranz.ʤu.ˈraː.na] 보르고냐 트란스주라나)’라고 불러 부르군디아 공작령을 이르는 ‘쥐라 이편의 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Cisjurensis 부르군디아 키스유렌시스, 프랑스어: Bourgogne Cisjurane [buʁ.ɡɔɲə.sis.ʒy.ʁanə] 부르고뉴 시스쥐란이탈리아어: Borgogna Cisgiurana [bor.ˈɡoɲ.ɲa.ʧiz.ʤu.ˈraː.na] 보르고냐 치스주라나)’와 구별하기도 하는데 사실 쥐라 산맥 양쪽 비탈에 걸쳐 있었으므로 정확히 들어맞는 이름은 아니다.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의 주민들은 고집이 세고 본능적으로 외부인을 경계하는 전형적인 고지인이었으며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공국이나 외부의 영향에 더 쉽게 노출된 저지대보다는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이 옛 부르군디아의 자유로운 영혼을 더 잘 간직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훗날 역사에 등장하는 스위스의 뿌리를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에서 찾기도 한다.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아를 왕국)(933년~1032년)

고지 부르군디아의 2대 왕이자 오세르의 로돌프의 아들인 로돌프 2세(937년 사망)는 923년 랑고바르드인의 왕(라틴어: rex Langobardorum 렉스 랑고바르도룸), 즉 이탈리아 왕으로도 즉위하여 한동안 생모리스와 이탈리아의 파비아(이탈리아어: Pavia [pa.ˈviˑ‿a]) 사이를 오갔다.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로돌프 2세에 등을 돌리고 저지 부르군디아의 섭정이던 아를의 위그(프랑스어: Hugues [yɡə], 독일어: Hugo [ˈhuː.ɡo] 후고이탈리아어: Ugo [ˈuː.ɡo] 우고)를 대신 이탈리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자 933년 로돌프와 위그는 기막힌 해결책을 찾았다. 로돌프가 위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위그는 로돌프를 고지와 저지 부르군디아의 연합 왕국의 왕으로 제안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이 탄생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의 상황을 언제나 주시하고 있던 독일에서는 위그와 로돌프의 거래가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다. 작센 공이자 독일 왕이며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는 오토(독일어: Otto [ˈɔ.to]) 1세는 로돌프 2세가 죽자 그의 15세 아들 콩라드(프랑스어: Conrad [kɔ̃.ʁad], 독일어: Konrad [ˈkɔn.ʁaːt] 콘라트이탈리아어: Corrado [kor.ˈraː.do] 코라도)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부르군디아를 침공하고 이탈리아의 위그가 부르군디아마저 물려받는 것을 막았다. 그리하여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은 존속이 허용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은 수도가 아를이었기 때문에 아를 왕국, 독일어로는 아렐라트(Arelat [a.ʁe.ˈlaːt])라고 한다. 강역은 빙하로부터 바다까지 펼쳐진 론 강 유역이었다. 북으로는 ‘부르군디아의 문(독일어: Burgundische Pforte [bʊʁ.ˈɡʊn.dɪ.ʃə ˈp͜fɔʁ.tə] 부르군디셰 포르테)’으로도 알려진 벨포르(프랑스어: Belfort [bɛl.fɔːʁ]) 통로를 통해 라인란트(독일어: Rheinland [ˈʁaɪ̯n.lant]) 지방으로 진출이 가능했으며 남쪽의 항구 아를과 마르세유(프랑스어: Marseille [maʁ.sɛjə])를 통해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에 왕래할 수 있었다.

아를에 있는 왕의 지배는 멀리 떨어진 내륙 지방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해서 백작·주교·도시 등이 각각의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비에누아(프랑스어: Viennois [vjɛ.nwa], 오늘날의 프랑스 동남부) 지역에서는 알봉(프랑스어: Albon [al.bɔ̃])을 근거지로 한 백작들이 활약했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인 기그(프랑스어: Guigues [ɡiɡə], 1030년 사망)는 몽스니 산(프랑스어: Mont-Cenis [mɔ̃.sə.ni]이탈리아어: Moncenisio [mon.ʧe.ˈniː.zjo] 몬체니시오, 오늘날의 프랑스 남동부 이탈리아 국경 근처)까지 이르는 작은 제국을 이룩했다. 그의 후손 가운데 한 명이 문장(紋章)으로 돌고래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알봉 백작들은 비에누아의 도팽(프랑스어: dauphin [do.fɛ̃], 라틴어: delphinus 델피누스, ‘돌고래’를 뜻함)이라는 독특한 칭호를 얻게 되었다. 알봉 백작·비에누아 도팽이 다스리는 땅은 도피네(프랑스어: Dauphiné [do.fi.ne], 라틴어: Delphinatus 델피나투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자유백작령(프랑슈콩테)(982년~1678년)

브장송을 중심으로 한 고지 부르군디아 변경 지역의 궁정백작(프랑스어: comte palatin [kɔ̃tə.pa.la.tɛ̃] 콩트팔라탱)들은 알사티아(라틴어: Alsatia,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 알자스 프랑스어: Alsace [al.zasə])와 수에비아(라틴어: Suebia,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 슈바벤 독일어: Schwaben [ˈʃvaː.bn̩])의 독일인들에 맞서 방어하는 대가로 특혜를 누렸다.

982년에는 이탈리아의 왕 아달베르토(이탈리아어: Adalberto [a.dal.ˈbɛr.to], 프랑스어: Aubert [o.bɛːʁ] 오베르 또는 Adalbert [a.dal.bɛːʁ] 아달베르독일어: Adalbert [ˈaː.dal.bɛʁt] 아달베르트)의 아들인 오트기욤(프랑스어: Otte-Guillaume [ɔtə.ɡi.joːmə] 오트기욤이탈리아어: Ottone Guglielmo [o.ˈtoː.ne.ɡuʎ.ˈʎɛl.mo, -ˈʎel-, o.to.ne-] 오토네굴리엘모독일어: Otto Wilhelm [ˈɔ.to.ˈvɪl.hɛlm] 오토빌헬름)이 초대 궁정백작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부르군디아 궁정백작(후에 자유백작)은 36대에 걸쳐 17세기까지 이어졌다.

오트기욤은 1002년에 프랑스의 부르군디아 공작령도 물려받았으나 2년만에 프랑스 왕이 침공하여 공작령을 차지하는 바람에 아를 왕국의 궁정백작령만 남았다. 한편 오트기욤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아를 왕 로돌프 3세는 독일의 왕 하인리히(독일어: Heinrich [ˈhaɪ̯n.ʁɪç]) 2세(재위 1014년~1024년)의 보호를 요청했으며 대신 자신이 후계자 없이 죽으면 그에게 왕국 전체를 물려주기로 했다. 오트기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하인리히 2세가 궁정백작령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막았다.

하인리히 2세가 1024년에 먼저 죽고 오트기욤이 1026년에 뒤를 이었다. 1032년 로돌프 3세가 결국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사촌인 블루아(프랑스어: Blois [blwa]) 백작 외드(프랑스어: Eudes [øːdə]독일어: Odo [ˈoː.do] 오도) 2세와 하인리히 2세의 아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가 아를 왕국의 왕위를 서로 주장하였다. 외드의 주군인 프랑스 왕이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정백작령을 포함한 아를 왕국은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소유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왕국(1032년~?)과 소(小)부르군디아 공국(1127년~1218년), 부르군디아 방백령(1127년~)

아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들어온 뒤 부르군디아 왕국으로 개명되었다. 그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은 1032년 이후 독일 왕국(라틴어: Regnum Teutonicum 레그눔 테우토니쿰), 이탈리아 왕국(라틴어: Regnum Italiae 레그눔 이탈리아이), 부르군디아 왕국(라틴어: Regnum Burgundiae 레그눔 부르군디아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브라이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왕국을 아를 왕국의 연속으로 보았지만 데이비스는 정치적 맥락과 영토가 많이 바뀌었다며 제7왕국으로 따로 친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멀리 떨어진 부르군디아 왕국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 독일어는 부르군디아 왕국에 별로 파고들어가지 못하고 현대 아르피타니아어의 조상인 프랑스·프로방스어가 일상어로 계속 쓰였다.

독일의 체링겐(독일어: Zähringen [ˈʦɛː.ʁɪŋ.ən]) 귀족 가문에 속한 콘라트 1세는 프라이부르크(독일어: Freiburg [ˈfʁaɪ̯.bʊʁk],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를 세워 통합된 지방 행정을 개척한 공로를 황제로부터 인정받아 1127년 부르군디아 왕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새로 지은 소(小)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Minor 부르군디아 미노르독일어: Klein Burgund [ˈklaɪ̯n bʊʁ.ˈɡʊnt] 클라인 부르군트) 공작령을 수여받았다. 소부르군디아 공작령의 강역은 쥐라 산맥 동쪽으로 펼쳐진 지대로 오늘날 스위스의 프랑스어권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소부르군디아 공작령에 속한 방백령(독일어: Landgrafschaft [ˈlant.ɡʁaːf.ʃaft] 란트그라프샤프트)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부르군디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부르군디아 방백령의 강역은 툰(독일어: Thun [ˈtuːn], 오늘날의 스위스 중서부)과 졸로투른(독일어: Solothurn [ˈzoː.lo.tʊʁn], 오늘날의 스위스 서북부) 사이 아르 강(독일어: Aar [ˈaːɐ̯])의 양안에 해당된다. 어쩌면 졸로투른을 조금 지나 있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왕가의 발원지, 합스부르크(독일어: Habsburg [ˈhaːps.bʊʁk] 하프스부르크) 성까지 부르군디아 방백령에 속했을 수도 있다.

체링겐 가문은 총독이자 공작으로서 열심히 활동하며 프리부르(프랑스어: Fribourg [fʁi.buːʁ]), 부르크도르프(독일어: Burgdorf [ˈbʊʁk.dɔʁf]), 무르텐(독일어: Murten [ˈmʊʁ.tn̩]프랑스어: Morat [mɔ.ʁa] 모라), 라인펠덴(독일어: Rheinfelden [ˈʁaɪ̯n.fɛl.dn̩]), 툰 등의 도시를 세웠다(이들은 모두 오늘날 스위스에 있다). 체링겐 가문에서도 특히 적극적으로 활동한 백작 베르톨트(독일어: Berthold [ˈbɛʁ.tɔlt, ˈbɛʁt.hɔlt]) 5세는 툰 성을 세우고 1191년에는 베른(독일어: Bern [ˈbɛʁn]) 시를 세웠다. 그러나 그가 1218년에 후계자 없이 죽은 후 소부르군디아 공국은 사라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가운데 유일하게 부르군디아 왕국에 깊숙이 관여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독일어: Friedrich Barbarossa [ˈfʁiː.dʁɪç.baʁ.ba.ˈʁɔ.sa]), 프랑스어: Frédéric Barberousse [fʁe.de.ʁik.baʁ.bə.ʁusə] 프레데리크 바르브루스, 이탈리아어어: Federico Barbarossa [fe.de.ˈriː.ko.bar.ba.ˈros.sa] 페데리코 바르바로사)는 1152년 아헨에서 독일의 왕, 1154년 파비아에서 이탈리아의 왕으로 각각 즉위한지 한참 지나 1173년에야 아를에서 부르군디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부르군디아 궁정백작의 상속녀 베아트리스(프랑스어: Béatrice [be.a.tʁisə])를 둘째 아내로 맞은 후 부르군디아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 궁정백작령을 직접 통치하고 부르군디아 왕국 내의 다툼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내세울만한 성과를 보지 못했고 1190년 십자군 원정길에 성지에 이르지도 못하고 죽었다.

교황과 황제가 대립한 서임권 투쟁은 양쪽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분열에 일조했다. 부르군디아 왕국은 특히 지배력의 약화에 취약했다. 산악 지형 때문에 거기서 벌이는 군사 작전마다 불확실성을 내포했다. 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려면 먼저 독일의 왕으로 즉위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이 자동적으로 우선시되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교황이 있는 이탈리아가 중요시되었다. 부르군디아 왕국은 상대적으로 황제의 관심 밖에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부르군디아 왕국의 영토는 한 조각 한 조각 떨어져나갔다. 프로방스가 먼저 부르군디아 왕국에서 떨어져나갔고 콩타브네생(프랑스어: Comtat Venaissin [kɔ̃.ta.və.nɛ.sɛ̃])과 리옹, 도피네가 뒤를 이었다.

1127년 프로방스의 마지막 상속녀는 바르셀로나 백작인 남편에게 상속권을 넘겼다. 그리하여 프로방스는 카탈루냐의 지배권 안에 들어가고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권 밖에 놓이게 되었다. 1246년에는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 가문의 마지막 상속녀가 프랑스 앙주 왕가에 속한 남편에게 상속권을 넘겨 이후 프로방스는 프랑스 왕의 가신인 프로방스 백작이 다스리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13세기 초 알비 십자군을 통해 랑그도크(프랑스어: Languedoc [lɑ̃ɡə.dɔk])를 정복하여 론 강 우안까지 진출하였다. 알비 십자군은 가톨릭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카타리파(라틴어: Cathari, 프랑스어: cathares [ka.taːʁə] 카타르)를 상대로 일으킨 십자군으로 알비(프랑스어: Albi [al.bi]) 시와 그 주변에 카타리파가 많다고 하여 이름이 붙었다. 1274년에는 론 강 맞은편의 콩타브네생 백작이 후계자가 없어 영지를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1348년에는 콩타브네생에 둘러싸인 아비뇽(프랑스어: Avignon [a.vi.ɲɔ̃])이 유배된 교황에게 팔렸다.

론 강 유역의 중심 도시인 리옹은 상업도시로 번영하였으며 매우 중요한 대주교구로 가톨릭 교회의 공의회가 두 차례 리옹에서 열렸다. 1245년 제1차 리옹 공의회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했다. 아직도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리옹에 황제가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리옹은 대주교와 리오네포레(프랑스어: Lyonnais-Forez [ljɔ.nɛ.fɔ.ʁɛ]) 백작, 리옹의 부호들 사이의 고질적인 갈등으로 1311년 들어온 프랑스 군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프랑스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의 요충지 도피네에도 마찬가지로 눈독을 들였는데 알봉 백작·비에누아 도팽들은 도피네를 계속 붙들고 있다 1349년 비로소 프랑스 왕에게 사적으로 매각했다. 그 후로 도피네를 다스리는 알봉 백작의 칭호였던 도팽은 프랑스 왕의 후계자의 작위가 되었다.

이렇게 부르군디아 왕국에서 프랑스를 접한 부분이 차츰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 1264년의 콘라트 4세 이후의 황제들은 부르군디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더이상 공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고위 성직자들은 흔히 실질적인 독립국의 수장인 이른바 대공주교의 지위를 획득했다. 시옹(프랑스어: Sion [sjɔ̃])과 제네바의 주교들은 초기에 독립했고 다른 이들도 뒤따랐다.

북부의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에서는 이미 르노(프랑스어: Renaud [ʁə.no], 독일어: Rainald [ˈʁaɪ̯.nalt] 라이날트) 3세(1148년 사망) 때에 이미 작은 제국을 결성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이웃하는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령의 마콩(프랑스어: Mâcon [mɑ.kɔ̃]) 백작령을 상속받은 후 스스로 황제의 종주권에서 벗어난 ‘자유백작(프랑스어: franc comte [fʁɑ̃ kɔ̃ːtə] 프랑 콩트독일어: Freigraf [ˈfʁaɪ̯.ɡʁaːf] 프라이그라프)’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신성 로마 제국은 벌로 그의 영지 대부분을 빼앗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결혼한 베아트리스는 바로 르노 3세의 딸이었으며 르노의 ‘자유백작령’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1178년에는 르노 3세의 손자인 브장송의 대주교가 교구를 이른바 제국도시(독일어: Reichsstadt [ˈʁaɪ̯çs.ʃtat] 라이히스슈타트)로 만들어 궁정백작령에 봉토 부담금을 내지 않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십 년 후 바젤(독일어: Basel [ˈbaː.zl̩])의 주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대공주교국을 세워 교구 뿐만이 아니라 한때 르노 3세로부터 압수되었던 주변 지역까지도 다스리게 되었다.

훗날 스위스를 이루는 땅의 상당 부분은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왕국의 땅에서 나왔다. 13세기 초 발레 지역 시옹 주교령의 농민 일부가 오늘날의 스위스 동부에 있는 그라우뷘덴(독일어: Graubünden [ɡʁaʊ̯.ˈbʏn.dn̩])으로 이주하여 그들이 가지고 온 교량 건축 기술에 힘입어 쇨레넨(독일어: Schöllenen [ˈʃœ.lə.nən]) 협곡을 지나는 통로를 개설,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귀중한 무역로를 열었다. 1291년 8월 이 통로를 관리하는 우리(독일어: Uri [ˈuː.ʁi]), 슈비츠(독일어: Schwyz [ˈʃviːʦ]), 운터발덴(독일어: Unterwalden [ˈʊn.tɐ.val.dn]) 지방의 주민들은 외부의 간섭을 저지하기로 맹세했다. 이것이 스위스 연맹의 시초이다.

당대에는 상속지가 국경을 무시하고 서로 다른 정치권으로 넘어가거나 혼인을 통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1156년에는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이 독일의 호엔슈타우펜(독일어: Hohenstaufen [ˌhoː.ən.ˈʃtaʊ̯.fn̩]) 왕가에게로 넘어갔으며 1208년에는 바이에른의 안덱스(독일어: Andechs [ˈan.dɛks]) 가문에게로, 1315년에는 프랑스 왕가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1330년에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의 부인인 프랑스의 잔 3세가 어머니로부터 부르고뉴 궁정백작령을 물려받은 후 프랑스에 속한 부르고뉴 공작령과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의 연합이 가시화되었다. 프랑스 왕의 딸인 동시에 부르군디아 궁정백작이 된 마르그리트(프랑스어: Marguerite [maʁ.ɡə.ʁitə], 1310년~1382년)는 이 연합을 재촉하고자 별다른 근거 없이 1366년부터 ‘부르군디아 백작령’ 대신 ‘프랑스콩테(프랑스어: France-Comté [fʁɑ̃sə.kɔ̃.te])’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앞서 르노 3세가 쓴 프랑 콩트, 즉 ‘자유백작’이라는 칭호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마르그리트의 사후 오늘날 쓰는 이름인 ‘프랑슈콩테(프랑스어: Franche-Comté [fʁɑ̃ʃə.kɔ̃.te])’, 즉 ‘자유백작령’이라는 형태로 굳어지게 된다.

부르군디아 결합국(1384년~1477년)

14세기 중반 프랑스 왕국과 부르군디아 공작령·궁정백작령에서 동시에 계승에 관련된 위기가 찾아왔다. 부르군디아 공작인 루브르의 필리프(프랑스어: Philippe de Rouvres [fi.lipə.də.ʁuː.vʁə] 필리프 드 루브르, 1347년~1361년)는 플랑드르 백작령(프랑스어: Flandre [flɑ̃ː.dʁə]네덜란드어: Vlaanderen [ˈvlaːn.də.rən] 플란데런, 오늘날의 벨기에 서북부와 프랑스 북부)의 상속녀 당피에르(프랑스어: Dampierre [dɑ̃.pjɛːʁə])의 마르그리트(프랑스어: Marguerite de Dampierre [maʁ.ɡə.ʁitə.də.dɑ̃.pjɛːʁə] 마르그리트 드 당피에르, 네덜란드어: Margaretha van Male [mɑr.ɣa.ˈreː.ta.vɑn.ˈmaː.lə] 마르하레타 판 말러(말러의 마르하레타))를 아내로 맞았는데 1361년 후계자 없이 단명했다. 복잡한 계승 절차를 통해 프랑스 왕 장(프랑스어: Jean [ʒɑ̃]) 2세가 부르군디아 공작 지위를 상속받고 공작령을 프랑스 왕 직영지로 합병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얼마 안 되어 1364년에 세상을 떴다.

복잡하게 얽힌 계승 문제는 장자 상속권이 무시되고 장 2세의 넷째이자 막내 아들로서 이미 십 대의 나이에 1356년의 푸아티에(프랑스어: Poitiers [pwa.tje])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흑태자를 상대로 전투에 참가했던 용담공 필리프(프랑스어: Philippe le Hardi [fi.lipə.lə.aʁ.di] 필리프 르 아르디(=용감한 필리프)네덜란드어: Filips de Stoute [ˈfi.lɪps.də.ˈstʌu̯.tə] 필립스 더 스타우터(=대담한 필립스)독일어: Philipp der Kühne [ˈfiː.lɪp.deːɐ̯.ˈkyː.nə] 필리프 데어 퀴네(=대담한 필리프))에게 부르고뉴 공작령이 돌아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더구나 용담공 필리프는 루브르의 필리프의 미망인 당피에르의 마르그리트를 아내로 맞았는데 양 부르군디아와 아르투아 백작령(프랑스어: Artois [aʁ.twa],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등 용담공 필리프가 물려받은 영지와 플랑드르 백작령을 비롯 양쪽이 물려받은 기타 영지를 모두 합치니 북해의 불로뉴(프랑스어: Boulogne [bu.lɔɲə],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에서 검은 숲(독일어: Schwarzwald [ˈʃvaʁʦ.valt] 슈바르츠발트,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에 이르는 제법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 후로도 필리프와 마르그리트의 후손들은 브라반트(네덜란드어: Brabant [braː.bɑnt], 오늘날의 네덜란드 남부와 벨기에 북부·중부) 공국, 룩셈부르크(독일어: Luxemburg [ˈlʊ.ksm̩.bʊʁk], 프랑스어: Luxembourg [lyk.sɑ̃.buːʁ] 뤽상부르, 룩셈부르크어: Lëtzebuerg [ˈlə.ʦə.buɐ̯ɕ] 레체부에르시, 오늘날의 룩셈부르크와 그 주변) 공국 등을 물려받아 영토를 늘려갔다. 프랑스는 1337년 시작된 잉글랜드와의 백 년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통일된 제국 헌법을 도입하고 선거제를 개정한 1356년의 금인칙서의 후폭풍으로 각각 홍역을 치르던 틈을 타서 프랑스도 독일도 아닌 부르군디아라는 실체가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그 뒤에는 오래 전에 사라진 나라인 로타링기아를 부활시킨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깔려있었다.

이 새로운 부르군디아 복합체를 흔히 부르고뉴 공국이라고 하고 용담공 필리프와 그 자손들이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프랑스어: Valois [va.lwa])에 속했다고 해서 발루아 부르고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부르군디아 공작령과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 및 다른 여러 영토가 동군연합으로 합친 것이므로 부르군디아 제국(諸國, 즉 ‘나라들’; 프랑스어: États bourguignons [e.ta.buʁ.ɡi.ɲɔ̃] 에타 부르기뇽, 네덜란드어: Bourgondische landen  [bur.ˈɣɔn.di.sə.ˈlɑn.dən] 부르혼디서 란던독일어: Burgundischen Länder [bʊʁ.ˈɡʊn.dɪ.ʃn̩.ˈlɛn.dɐ] 부르군디셴 렌더) 또는 부르군디아 결합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수장은 공작인 동시에 백작인 ‘공백작’이었다. 그러나 왕은 아니었다. 당시 왕관은 교황이 수여했는데 공백작이 다스리는 모든 영토는 명목뿐이지만 프랑스 왕이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속했으므로 이들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부르군디아 왕을 승인할 교황은 없었다. 하지만 궁정의 화려함과 도시의 부, 적극적인 문화 후원 활동은 당대의 거의 모든 왕들을 능가했다. 부르군디아의 공백작은 공식 칭호만 없을 뿐 사실상 왕이었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영토 기반은 이전의 다른 부르군디아와는 상당히 달랐다. 부르군디아 공작령과 백작령이 중심이 되었지만 멀리 북쪽의 해안 지방이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고 결정적으로 역사적인 부르군디아 지방의 대부분은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브루게(네덜란드어: Brugge [ˈbrʏ.ɣə] 브뤼허, 오늘날의 벨기에 북서부)에서 태어난 당피에르의 마르그리트의 상속지는 남편의 상속지보다 훨씬 크고 부유했다.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프랑스어: Picardie [pi.kaʁ.di])에 해당하는 옛 프랑스 백작령인 베르망두아(프랑스어: Vermandois [vɛʁ.mɑ̃.dwa])와 퐁티외(프랑스어: Ponthieu [pɔ̃.tjø])로부터 각각 오늘날의 네덜란드 서부와 동부에 있었던 옛 신성 로마 제국 백작령 홀란트(네덜란드어: Holland [ˈɦɔ.lɑnt])와 헬데를란트(네덜란드어: Gelderland [ˈɣɛl.dər.lɑnt])까지 펼쳐졌으며 아미앵(프랑스어: Amiens [a.mjɛ̃]), 아라스(프랑스어: Arras [a.ʁɑːs], 이상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브루게, 겐트(네덜란드어: Gent [ˈɣɛnt] 헨트), 브뤼셀(프랑스어: Bruxelles [bʁy.sɛlə], 이상 오늘날의 벨기에), 암스테르담(네덜란드어: Amsterdam [ˌɑm.stər.ˈdɑm], 오늘날의 네덜란드) 등 저지대 나라들의 대도시를 모두 포함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던 위트레흐트(네덜란드어: Utrecht [ˈy.trɛxt], 오늘날의 네덜란드 중부)와 캉브레(프랑스어: Cambrai [kɑ̃.bʁɛ],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의 주교령, 리에주(프랑스어: Liège [ljɛːʒə], 오늘날의 벨기에 동부) 대주교령, 뤽쇠이(프랑스어: Luxeuil [lyk.sœj], 오늘날의 프랑스 동부) 교구 등도 부르군디아의 영향권에 놓여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영토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부와 독일 서북부 일부에 걸친 북쪽 부분을 ‘이쪽 나라들(프랑스어: les pays de par-deçà [le.pɛ.i.də.paʁ.də.sa, lɛ-, -pe-] 레 페이 드 파르드사)’라고 불러 부르군디아 공작령과 백작령이 중심이 된 남쪽의 ‘저쪽 나라들(프랑스어: les pays de par-delà [le.pɛ.i.də.paʁ.də.la, lɛ-, -pe-] 레 페이 드 파르들라)’과 구별했다. 공백작이 북부에서 지낼 때가 많았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나온 이름인데 물론 이 이름을 쓰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이쪽 나라들과 저쪽 나라들이 뒤바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북쪽 영토를 이르기 위해 ‘이쪽 나라들’ 대신 ‘낮은 나라들’ 또는 ‘저지대 나라들(프랑스어: les pays bas [le.pɛ.i.bɑ, lɛ-, -pe-] 레 페이 바)’이라는 표현이 생겼고 이게 네덜란드어로는 ‘더 라허 란던(de Lage landen [də.ˈlaː.ɣə.ˈlɑn.dən])’ 또는 ‘더 네데를란던(de Nederlanden [də.ˈneː.dər.lɑn.dən])’으로 표현되었다. 후자인 ‘네데를란던’은 그 후로 이 지방을 이르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는데 여기서 이름을 딴 오늘날의 네덜란드를 이르는 영어 이름인 ‘더 네덜런즈(the Netherlands [ðə.ˈnɛð.ər.ləndz])’가 나왔고 프랑스어로는 원래의 표현을 그대로 써서 ‘레 페이바(les Pays-Bas [le.pɛ.i.bɑ, lɛ-, -pe-])’라고 한다. 즉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역사적 습관 때문에 오늘날의 네덜란드를 복수형을 써서 ‘저지대 나라들’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정작 네덜란드어에서는 단수형인 ‘네데를란트(Nederland [ˈneː.dər.lɑnt])’를 쓴다. 단 ‘네덜란드 왕국’은 복수형인 ‘네데를란던’을 써서 ‘코닝크레이크 데르 네데를란던(Koninkrijk der Nederlanden [ˈkoː.nɪŋ.krɛi̯ɡ.dɛr.ˈneː.dər.lɑn.dən])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럽의 네덜란드 본토 이외에 카리브 해의 영토도 포함한다고 해서 ‘네덜란드들의 왕국’이란 뜻으로 쓰는 것이다. 영어와 네덜란드어에서는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구별하기 위해 역사 지명으로 쓰인 ‘네덜런즈’와 ‘네데를란던’을 각각 ‘더 로 컨트리스(the Low Countries [ðə.ˈloʊ̯.ˈkʌntɹ.iz])’와 ‘더 라허 란던(de Lage landen)’으로 흔히 바꿔 부르는데 프랑스어에서는 딱히 여기에 해당되는 표현이 없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네덜란드 뿐만이 아니라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와 독일 일부 등도 포함되며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생기기 전에도 쓰인 지명이므로 둘을 구별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확립된 용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 글에서는 ‘저지대 나라들’로 통일한다. 프랑스어의 페이(pays [pɛ.i, pe-]), 네덜란드어의 란트(land [ˈlɑnt]), 영어의 컨트리(country [ˈkʌntɹ.i]) 등은 에타(état [e.ta])/스타트(staat [ˈstaːt])/스테이트(state [ˈsteɪ̯t])와 달리 꼭 정치체를 이르는 것이 아니므로 번역어로는 ‘국가’보다는 ‘나라’가 적절하다.

15세기는 중세 도시의 전성기였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에 속한 저지대 나라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함께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르군디아의 도시들은 예술과 학문과 상업이 같이 번영하는 무대가 되었다. 로베르 캉팽(프랑스어: Robert Campin [ʁɔ.bɛʁ.kɑ̃.pɛ̃], 1378년경~1444년), 얀 판에이크(네덜란드어: Jan van Eyck [ˈjɑn.vɑn.ˈɛi̯k], 1390년경~1441년), 로히르 판데르베이던(네덜란드어: Rogier van der Weyden [ro.ˈɣiːr.vɑn.dɛr.ˈʋɛi̯.dən], 1400년경~1464년), 한스 멤링(독일어: Hans Memling [ˈhans.ˈmɛm.lɪŋ], 1430년경~1494년) 등 이른바 ‘북방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플랑드르 화풍의 거장들은 부르군디아 궁정의 후원을 받고 활동하였다.

음악도 발전했다. 이른바 부르군디아 악파는 디종의 공작 궁정 예배실에서 시작되어 부르군디아 전역, 특히 저지대 나라들에서 번창했으며 브라반트인 기욤 뒤페(프랑스어: Guillaume Dufay [ɡi.jomə.dy.fɛ] 또는 [-dy.fa.i] 뒤파이, 1397년~1470년)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그 뒤를 이은 프랑스·플랑드르 악파도 다성음악의 대가 조스캥 데프레(프랑스어: Josquin des Prez [ʒɔs.kɛ̃.de.pʁe, -dɛ-], 1450년경~1520년)를 중심으로 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하였다.

문학과 철학도 번창했다.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로테르담(네덜란드어: Rotterdam [ˌrɔ.tər.ˈdɑm])의 에라스뮈스(네덜란드어: Erasmus [e.ˈrɑs.mʏs, -məs], 라틴어: Erasmus 에라스무스, 1466년~1536년)도 부르군디아 결합국 사람이었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에서는 라틴어와 더불어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같이 발전했다.

그러나 부르군디아의 공백작들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래도 정치였으며 프랑스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기도 했다. 잉글랜드와 백 년 전쟁을 간헐적으로 벌이고 있던 프랑스의 조정은 아르마냐크(프랑스어: Armagnac [aʁ.ma.ɲak])의 백작이 수령이 된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군디아 및 잉글랜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부르고뉴파’ 사이의 내분에 휘말렸으며 이는 치열한 내전으로 이어졌다. 플랑드르의 모직 산업은 잉글랜드의 양모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플랑드르인들은 자연히 잉글랜드에 우호적이었고 백 년 전쟁에서도 잉글랜드의 편을 들었다. 플랑드르를 차지한 부르군디아 공백작들은 프랑스 군의 지원으로 친잉글랜드파 플랑드르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이들 역시 잉글랜드와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용담공 필리프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어 부르군디아 공백작이 된 용맹공 장(프랑스어: Jean sans Peur [ʒɑ̃.sɑ̃.pœːʁ] 장 상 푀르(=두려움 없는 장)네덜란드어: Jan zonder Vrees [ˈjɑn.zɔn.dər.ˈvreːs] 얀 존더르 프레이스(=두려움 없는 얀)독일어: Johann Ohnefurcht [jo.ˈhan.ˈoː.nə.ˈfʊʁçt, ˈjoː.han-] 요한 오네푸르히트(=두려움 없는 요한))은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내전에 개입하여 1418년 파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용맹공 장은 이듬해 프랑스 왕태자의 추종자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이에 부르군디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힘을 얻은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세력권은 수 년 내에 최고점에 달했다. 그러다가 1435년 부르군디아 편이던 잉글랜드 왕자가 죽자 부르군디아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파리를 프랑스 왕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프랑스 왕은 동맹을 잃은 잉글랜드를 상태로 영토를 수복하여 백 년 전쟁은 1453년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시대는 용담공 필리프의 증손자인 무모공 샤를(프랑스어: Charles le Téméraire [ʃaʁlə.lə.te.me.ʁɛːʁə] 샤를 르 테메레르(=무모한 샤를), 네덜란드어: Karel de Stoute [ˈkaː.rəl.də.ˈstʌu̯.tə] 카럴 더 스타우터(=대담한 카럴), 독일어: Karl der Kühne [ˈkaʁl.deːɐ̯.ˈkyː.nə] 카를 데어 퀴네(=대담한 카를)) 대에 막을 내린다. 샤를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공백작위를 물려받기 전인 1466년에 이미 디낭(프랑스어: Dinant [di.nɑ̃], 오늘날의 벨기에 중남부) 시가 반란을 꾀하고 자신과 어머니를 모욕했다며 주민 모두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살할 것을 명하여 무자비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냈다.

야심에 가득 찬 샤를은 1471년 프랑스 왕의 종주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왕이 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1473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에게서 그를 기존 영토는 물론 로렌 공국, 사부아/사보이아 공국, 클레베 공국(독일어: Kleve [ˈkleː.və], 네덜란드어: Kleef [ˈkleːf] 클레이프, 오늘날의 독일 서부와 네덜란드 동부) 등의 종주권을 가지는 왕으로 인정하겠다는 동의마저 얻어냈으나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왕으로 봉하기 전에 마음을 바꾸었다.

샤를은 영토와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심으로 결국 사방에 적을 만들었고 이들은 1474년~1477년 일련의 부르군디아 전쟁에서 샤를에 맞서 연합하게 된다. 서쪽으로는 프랑스 왕 루이 11세, 동쪽으로는 로렌 공국과 신성 로마 제국, 스위스가 부르군디아를 압박하게 된 것이다.

이미 옛 고지 부르군디아의 상당 부분을 흡수한 스위스는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천적으로 드러났다. 스위스 군과 맞선 세 차례의 큰 전투에서 샤를은 굴욕적으로 참패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전투는 1477년 로렌 공국의 수도 낭시(프랑스어: Nancy [nɑ̃.si],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에서 로렌 공국과 스위스의 연합군을 상대로 벌였는데 여기서 샤를은 전사하고 만다. 이 전투에 대해서 기록한 부르군디아인 역사가 필리프 드 코민(프랑스어: Philippe de Commynes [fi.lipə.də.kɔ.minə])은 무모공 샤를이 유럽의 절반을 얻어도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프랑스 부르고뉴 주(1477년~1791년)와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트 제국권(1548년~1795년)

수 년 이내에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땅은 흩어졌다.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프랑스가 재빨리 다시 차지하였으며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 즉 프랑슈콩테는 얼마 후 신성 로마 제국에게 돌아갔다. 공작령과 저지대 나라들의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샤를의 19세 딸 마리(프랑스어: Marie [ma.ʁi]네덜란드어: Maria [ma.ˈriː.a] 마리아독일어: Maria [ma.ˈʁiː.a] 마리아, 1457년~1482년)는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독일어: Maximilian von Habsburg [ma.ksi.ˈmiː.li̯aːn.fɔn.ˈhaːps.bʊʁk] 막시밀리안 폰 하프스부르크, 1459년~1519년)과 결혼하여 공작령을 제외한 부르군디아의 영토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나머지 부르군디아 영토와 완전히 갈라졌다.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프랑스 왕국에 되돌려져 부르고뉴 주(프랑스어: province [pʁɔ.vɛ̃ːsə] 프로뱅스)가 되었다. 그런데 헷갈리기 딱 좋게 합스부르크 왕가는 공작령을 잃었으면서도 부르군트 공작이라는 칭호는 계속 썼다. 그래서 1477년부터 1795년까지 합스부르크 황제들이 쓴 부르군트 공작이라는 칭호는 이전의 황제들이 썼던 부르군디아 왕이라는 칭호와 가리키는 영토가 다르다.

궁정백작령, 즉 프랑슈콩테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1477년에는 프랑스가 차지했으나 16년 후 상리스(프랑스어: Senlis [sɑ̃.lis],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반환되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부르군트 상속지에 더해졌다.

이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은 수많은 구성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여러 구성 영토를 묶은 제국 크라이스(독일어: Reichskreis [ˈʁaɪ̯çs.kʁaɪ̯s] 라이히스크라이스, 라틴어: circulus imperii 키르쿨루스 임페리이)라는 행정 단위를 도입했다. 제국 크라이스의 번역명은 확립된 것이 없고 관구라고 쓰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가톨릭 교회의 행정 구역명과 같고 ‘원, 동그라미’를 뜻하는 크라이스의 원 뜻을 살리지 못하므로 여기서는 제국권(帝國圈)이라고 쓰도록 한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독일에서는 비슷한 용어인 란트크라이스(독일어: Landkreis [ˈlant.kʁaɪ̯s]) 또는 크라이스(독일어: Kreis [ˈkʁaɪ̯s])가 쓰이는데 이 경우는 대한민국의 군(郡)에 대응되는 하위 행정 구역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옛 부르군디아 영토 대부분은 1548년에 부르군트 제국권(독일어: Burgundischer Reichskreis [bʊʁ.ˈɡʊn.dɪ.ʃɐ ˈʁaɪ̯çs.kʁaɪ̯s] 부르군디셔 라이히스크라이스, 네덜란드어: Bourgondische Kreits [bur.ˈɣɔn.di.sə ˈkrɛi̯ts] 부르혼디서 크레이츠, 프랑스어: Cercle de Bourgogne [sɛʁ.klə.də.buʁ.ɡɔɲə] 세르클 드 부르고뉴, 라틴어: Circulus Burgundiae 키르쿨루스 부르군디아이)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계속된 싸움으로 부르군트 제국권의 영토는 차츰 줄어들었다.

1555년에는 제국권의 대부분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파가 다스리는 에스파냐에 넘어갔다. 그러나 25년 내에 그 절반 가량이 ‘일곱 개의 연합한 저지대 나라들의 공화국(네덜란드어: 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 [re.py.ˈbliɡ.dɛr.ˈzeː.vən.və.ˈreː.nɪɣ.də.ˈneː.dər.lɑn.dən] 레퓌블릭 데르 제번 페레니흐더 네데를란던)’, 즉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네덜란드의 전신이다. 그리하여 1715년 에스파냐에서 오스트리아로 반환되었을 때 원래의 20개 주 가운데 여덟 개만 남아있었다.

프랑슈콩테도 1555년 대부분이 에스파냐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수도 브장송만은 제국도시로 남았다가 1651년에야 프랑슈콩테(에스파냐어로는 엘 콘다도 프랑코 El Contado Franco [el.kon.ˈta.ðo.ˈfɾaŋ.ko])의 수도로 복귀했다. 그러나 1678년 네이메헌(네덜란드어: Nijmegen [ˈnɛi̯.ˌmeː.ɣən], 오늘날의 네덜란드 동부) 조약을 통해 백작령이 전부 프랑스에 넘어갔다. 그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 옛 부르군디아 왕국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앙시앵 레짐(프랑스어: ancien régime [ɑ̃.sjɛ̃.ʁe.ʒimə]), 즉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에서 최상위 행정 구역 단위는 프로뱅스, 즉 주였다. 루이 14세로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디종을 주도로 하는 부르고뉴 주와 브장송을 주도로 하는 프랑슈콩테 주가 나란히 프랑스 왕국 내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혁명 이후인 1791년 주(프로뱅스)를 비롯한 옛 행정 구역은 모두 폐지되었다. 옛 주에 대한 충성과 주에 따른 문화적 차이를 없애고 공화국에 충성하도록 국민을 통합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옛 주를 대체한 최상위 행정 구역 단위는 ‘분할된 것’을 뜻하는 데파르트망(프랑스어: département [de.paʁ.tə.mɑ̃])인데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려 전혀 없이 프랑스 공화국을 단순히 행정의 편의을 위하여 나눈 것으로 예전에 쓰던 이름 대신 강, 산 등 자연 지물의 이름을 붙여 역사적 기억의 단절을 꾀했다. 데파르트망의 크기에도 제한을 두어 혁명 이전에 30여 개 주가 있었던 데에 반해 데파르트망의 수는 곧 백 개 가량으로 늘어났다. 당연히 부르군디아/부르고뉴의 이름은 프랑스의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프랑스의 부르고뉴 레지옹(1982년~2015년)

어쩌면 유럽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된 프랑스에도 20세기에 변화가 찾아왔다. 1982년 지방 행정 구역의 개편으로 데파르트망의 상위 단위인 레지옹이 도입되고 조금이나마 지방 분권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본토에 한정하더라도 백 개 가까이 되던 데파르트망 대신 22개의 레지옹이 지방 행정 구역 최상위 단위가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에서 쓰는 용어에도 혼란이 생겼다. 보통 외국의 최상위 행정 구역은 ‘주(州)’로 번역하는 관습에 따라 1982년 이전에는 프랑스 지방 행정 구역의 최상위 단위였던 데파르트망을 ‘주’라고 했었다. 그래서 레지옹이 도입되자 이전처럼 데파르트망을 계속 ‘주’라고 하고 레지옹의 번역어를 따로 고를지, 아니면 이제부터는 레지옹을 ‘주’라고 하고 데파르트망은 ‘현(縣)’ 같은 다른 번역어로 바꿀지 혼란이 생겼다. 아직 용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 본 글에서는 레지옹, 데파르트망을 번역하지 않고 쓴다.

이를 통해 옛 프로뱅스 이름 상당수가 레지옹 이름으로 부활되었다.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도 레지옹 이름으로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레지옹을 만든 관료들은 혁명 직전의 지도만 참고한 듯 옛 공작령에게만 부르고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군디오크의 부르군디아 제2왕국부터 14세기 초까지 부르군디아의 핵심 영토이던 론 강과 손 강이 만나는 리옹 일대는 ‘론알프(프랑스어: Rhône-Alpes [ʁo.nalpə])’라고 이름붙인 레지옹에 포함시켰다. 관료들은 론알프 레지옹도 다른 어떤 레지옹 못지않게 부르고뉴(부르군디아)로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하다.

프랑스의 부르고뉴프랑슈콩테 레지옹(2016년~)

데이비스의 부르군디아에 대한 단원은 여기서 끝을 맺지만 부르군디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2014년 프랑스의 총리가 된 마뉘엘 발스(프랑스어: Manuel Valls [ma.nɥɛl.vals])의 제안으로 기존 레지옹의 통합을 통해 수를 줄이는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기획되었다. 그러자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 두 레지옹의 지사는 4월 14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두 레지옹을 합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자발적으로 통합 의사를 밝힌 레지옹은 이 둘 뿐이다. 나머지 레지옹의 개편은 중앙 의회에서 논의하고 결정했는데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는 외부의 개입 없이 스스로 통합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2014년 12월 17일 프랑스 의회는 프랑스 본토의 레지옹을 기존의 22개에서 13개로 수를 줄이는 개편안을 확정 발표하였다. 새 지방 행정구역은 2016년 1월 1일 발효되었다. 가칭 부르고뉴프랑슈콩테(프랑스어: Bourgogne–Franche-Comté) 레지옹이 새로 생긴 것이다. 공식 명칭은 2016년 7월 1일까지 정하기로 했는데 아마도 부르고뉴의 이름이 들어갈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데이비스의 목록에 제16 부르군디아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르군디아의 역사적 핵심 영토 가운데 론 강 유역은 빠졌지만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북쪽 저지대 나라들을 제외한 ‘저쪽 나라들’이 다시 뭉치게 되는 것이다.

‘뤼브루크의 기욤/뤼브룩의 빌럼’, 몽골 황제를 만나다: 중세 유럽인 이름 표기의 어려움

마르코 폴로(이탈리아어: Marco Polo [ˈmar.ko.ˈpɔː.lo], 1254년~1324년) 이전에도 몽골 제국의 황제를 만난 유럽인들이 있었다.

칭기즈 칸(Činggis Qaγan 칭기스 카간, 1162년경~1227년)이 세운 몽골 제국의 정복 활동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사한국(四汗國) 가운데 하나인 킵차크한국의 시조 바투 칸(Batu Qan, 1207년경~1255년)이 이끄는 몽골군은 1240년 동유럽의 키예프 대공국을 멸망시키고 이듬해에는 헝가리 평원을 휩쓸었다. 오스트리아의 빈을 코앞에 둔 몽골군의 서진을 멈춘 것은 유럽인들의 저항이 아니라 본국에서 제2대 황제 오고타이 칸(Ögödei/Ögedei Qaγan 오고데이/오게데이 카간, 1186년경~1241년)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바투 칸은 전통에 따라 다음 황제를 뽑기 위한 회의에 참여하러 정복 활동을 멈추고 수도 카라코룸(Qara Qorum, 오늘날의 몽골 중부)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유럽인들은 한숨을 돌렸지만 몽골군은 그들에게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들이 어디서 왔으며 언제 다시 돌아올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4세(라틴어: Innocentius IV)는 몽골 제국에 여러 사절을 보냈다. 그 가운데 한 명인 프란체스코회 수사 조반니 다피안 델카르피네(이탈리아어: Giovanni da Pian del Carpine [ʤo.ˈvan.ni.da.ˈpjan.del.ˈkar.pi.ne], 1185년경~1252년)는 카라코룸에서 제3대 황제 귀위크 칸(Güyüg Qaγan 구유그 카간, 재위 1246년~1248년)의 즉위식을 지켜보고 침략과 살육의 중단을 요청하는 교황의 친서를 그에게 전달했다.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에서 서한을 보냈다는 것 외에는 교황이 어떤 존재인지 알 리가 없는 귀위크 칸은 교황과 휘하 군주들이 직접 그를 찾아와 복종을 맹세할 것을 강요하는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교황의 서한은 라틴어로, 귀위크 칸의 답장은 페르시아어로 썼다.

도미니크회 수사 롱쥐모의 앙드레(프랑스어: André de Longjumeau [ɑ̃.dʁe.də.lɔ̃.ʒy.mo] 앙드레 드롱쥐모, 1200년경~1271년경)도 같은 시기 인노첸시오 4세의 사절로서 몽골 제국을 방문, 오늘날의 이란 북서부의 타브리즈(Tabriz 페르시아어: تبریز [tæb.ˈriːz])까지 여행하여 거기서 만난 몽골 장군에게 교황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몇 년 후에 앙드레는 제7차 십자군 원정(1248년~1254년)을 주도한 프랑스의 ‘성왕(聖王)’ 루이 9세(프랑스어: Louis IX [lwi.nœf] 루이 뇌프, 재위 1226년~1270년)의 사절로 몽골 제국을 다시 찾아 1249~50년의 겨울에 카라코룸 또는 그 근처로 추정되는 몽골 궁전까지 이르렀으나 귀위크 칸은 이미 죽고 그의 황후 오굴 카이미시(Oγul Qaimiš, 1251년 사망)가 섭정을 하고 있었다. 황후는 루이 9세의 서한을 알아서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해마다 금과 은을 조공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답장을 보냈다. 루이 9세는 오굴 카이미시의 오만한 서한에 충격을 받고 사절을 보낸 것을 크게 후회했다.

뤼브루크의 기욤/뤼브룩의 빌럼의 몽골 제국 여행

하지만 얼마 후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군을 이끌었던 바투 칸의 장남 사르타크(Sartaq, 1256년 사망)가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루이 9세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그와 연락을 취하고자 했다. 대신 앞선 사절단을 통해 받은 굴욕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번에는 왕이 보내는 정식 사절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플랑드르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선교사 뤼브루크의 기욤/뤼브룩의 빌럼(프랑스어: Guillaume de Rubrouck [ɡi.joːmə.də.ʁy.bʁuk] 기욤 드뤼브루크, 네덜란드어: Willem van Rubroek [ˈʋɪ.ləm.vɑn.ˈryː.bruk] 빌럼 판뤼브룩, 1220년경~1293년경, 이하 ‘기욤/빌럼’)에게 비공식적으로 친서와 선물을 딸려 보냈다. 루이 9세가 머무르고 있던 아크레(라틴어: Acre, 오늘날의 이스라엘 북부 아코 ʻAkko עַכּוֹ)에서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라틴어: Constantinopolis, 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 İstanbul)로 간 기욤/빌럼은 현지에서 왕의 사절 자격으로가 아니라 프란체스코회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선교의 여행을 스스로의 의지로 동방으로 떠나는 것이라는 설교를 하는 등 공식 사절로 비쳐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12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출발한 기욤/빌럼의 일행은 정식 사절단이 아닌 탓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를 거쳐 러시아 남부 볼가강 근처 사르타크의 주둔지에 이르렀다.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인 사르타크의 신하 한 명(기욤/빌럼은 그의 이름을 Coiac ‘코야크’로 적는다)이 기욤/빌럼을 사르타크에 소개해주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동방 기독교를 흔히 이르는 이름이다. 431년 에페수스(라틴어: Ephesus, 오늘날의 터키 에페스 Efes) 공의회에서 당시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라틴어: Nestorius, 386년~450년)의 그리스도에 관한 이론을 이단으로 결정하고 그를 파문시켰을 때 페르시아의 교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페르시아 교회의 전통을 계승하여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등 아시아 각 지역으로 퍼진 기독교의 교파를 네스토리우스교라고 부른다. 하지만 교회 분열의 원인이 어찌되었든 이들 지역의 기독교가 꼭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을 따른 것은 아니며 ‘네스토리우스교’는 서방 기독교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해서 오늘날 학자들은 ‘동방 기독교’와 같은 중립적인 이름으로 부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욤/빌럼이 쓴 용어인 ‘네스토리우스교’를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 오늘날 동방 기독교는 이슬람교 등의 세력에 밀려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서남해안 일부 정도에만 남아 있지만 13세기 당시에는 서방 기독교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퍼져 있었으며 신자 수도 더 많았을 것이라고 한다. 몽골 제국의 지도층에도 동방 기독교의 영향이 상당해서 칭기즈 칸의 막내 며느리이자 후에 원 세조가 되는 쿠빌라이 칸을 비롯한 네 아들을 모두 황제로 키운 소르칵타니(Sorqaqtani, 1252년 사망)는 독실한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였다.

사르타크는 기욤/빌럼에게 축복을 받고 그가 가지고 온 성경과 십자가를 살펴본 후 루이 9세의 친서를 확인했다. 기욤/빌럼은 라틴어로 된 원본을 미리 아랍어와 시리아어(Syriac, 서남아시아의 공통어로 쓰이던 중세 아람어)로 번역해왔지만 사르타크는 세 언어 모두 할 줄 몰랐다. 하지만 그의 궁중에 아랍어와 시리아어를 하는 이들이 있어 서한의 내용을 몽골어로 설명해주었다. 사르타크는 자신의 권한만으로는 서한에 답할 수 없다며 아버지인 바투 칸에게 기욤/빌럼의 일행을 보냈다. 기욤/빌럼을 떠나보내면서 코야크와 서기 몇 명은 그에게 사르타크가 기독교인이라고 보고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르타크는 기독교인도 타타르인도 아니고 몽골인이라는 것이었다(타타르인은 원래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간 튀르크계 부족 가운데 하나인 타타르족에 속한 이들을 이르지만 이에 무지한 유럽인들은 몽골인들도 타타르인으로 부르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기독교인’을 종족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욤/빌럼은 이를 눈치챘으면서도 사르타크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결론은 받아들인 듯하다. 사르타크가 그리스도를 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인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대의 다른 기록들로 볼 때 사르타크는 실제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며 기욤/빌럼은 서방 기독교인으로서의 편견 때문에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수 있다.

기욤/빌럼 일행은 볼가 강을 가로질러 바투 칸을 만나고 좋은 대접을 받았지만 서한의 내용에 대한 답변은 수도 카라코룸에서 결정해야 한다며 또다시 떠넘겨졌다. 그래서 기나긴 여정 끝에 마침내 마르코 폴로가 태어난 해인 1254년, 카라코룸 근처에서 몽골 제국의 제4대 황제이자 칭기즈 칸의 손자인 몽케 칸(Möngke Qaγan 몽케 카간, 재위 1251년~1259년)을 알현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약 7개월 간 몽케 칸과 함께 머물면서 카라코룸에도 입성하고 네스토리우스교·불교·이슬람교 신자들과 함께 황제 앞에서 종교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기도 했다. 비록 황제를 개종시키는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1255년 유럽에 돌아온 후에 루이 9세에게 바친 그의 여정에 대한 기록은 몽골 제국의 지리와 문화, 특히 종교에 대한 상세한 사실 위주의 묘사로 그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 아래 있던 서유럽과 중부 유럽의 공통어이던 라틴어로 썼으며 한 사본에 붙은 제목은 Itinerarium fratris Willelmi de Rubruquis de ordine fratrum Minorum, Galli, anno grat. 1253 ad partes orientales, 즉 《프랑스의 작은형제회 수도사 Willelmus de Rubruquis의 1253년 동방으로의 여정》이다. ‘작은형제회’는 프란체스코회의 다른 이름이며 Willelmi는 기욤/빌럼의 라틴어 이름인 Willelmus의 속격(屬格) 형태이다. 보통 우리가 라틴어 이름을 논할 때는 주격(主格) 형태를 기본형으로 삼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친숙한 라틴어 이름 가운데는 제2변화 남성 단수형의 주격 어미인 -us ‘우스’로 끝나는 것이 많다(Julius ‘율리우스’, Augustus ‘아우구스투스’ 등). 왜 우리가 ‘기욤’ 또는 ‘빌럼’이라고 부르는 이름이 라틴어로 Willelmus인지는 뒤에 자세하게 설명한다.

뒤의 de Rubruquis는 기욤/빌럼의 출신지를 나타낸다. 성(姓)이 흔하지 않던 중세 인물은 흔히 출신지 또는 활동지로 구별한다. 기욤/빌럼이 속한 수도회인 프란체스코회의 창립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이탈리아어: Francesco d’Assisi [fran.ˈʧes.ko.das.ˈsiː.zi] 프란체스코 다시시)는 아시시(오늘날의 이탈리아 중부) 출신이어서 그렇게 부른다. 또 잉글랜드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오컴의 윌리엄(영어: William of Ockham [ˈwɪl.jəm.əv.ˈɒk.əm] 윌리엄 오브 오컴)은 영국 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오컴 출신이다. 이 지명의 현 철자는 Ockham이지만 오컴의 윌리엄의 저서에 나오는 유명한 원리인 ‘오컴의 면도날’은 옛 철자를 써서 Occam’s razor로 흔히 부른다. 한편 프랑스의 성직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프랑스어: Bernard de Clairvaux [bɛʁ.naʁ.də.klɛʁ.vo] 베르나르 드클레르보)는 프랑스의 클레르보 수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하여 이름이 붙었으니 출신지보다는 활동지가 이름이 된 경우이다.

프랑스령 플랑드르의 뤼브루크/뤼브룩

그러면 de Rubruquis가 의미하는 장소는 어디일까? “~로부터”를 뜻하는 라틴어의 전치사 de의 목적어는 탈격(奪格) 형태가 쓰이므로 Rubruquis는 탈격형이다. 라틴어의 격변화에서 제1변화와 제2변화의 복수 탈격형에 어미 -is가 쓰인다. 그런데 이 여행기는 사본마다 저자를 나타내는 철자가 조금씩 다른 경우가 많아서 Willelmi de Rubruquis 대신 Guillelmi de Rubrock, Willelmi de Rubruc, Willielmi de Rubruquis, Guilelmi de Rubruquis 등 다양한 표기가 쓰인다. 여기서 Rubrock, Rubruc 등에서는 그의 출신지를 탈격 어미 없이 썼다.

오늘날 프랑스 북부 노르(Nord [nɔːʁ]) 주에는 뤼브루크(프랑스어: Rubrouk [ʁy.bʁuk], 네덜란드어: Rubroeck [ˈryː.bruk] 뤼브룩)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12세기와 13세기 문헌에서 이 지명은 Rubruc, Ruburch, Rubrouch, Rubroc, Rubroec, Rubruech 등의 철자로 등장한다(출처). 그러므로 de Rubruquis는 이 마을 출신을 뜻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욤/빌럼의 출신지는 바로 이 뤼브루크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지명의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발음은 거의 비슷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 프랑스어의 어말 무성 파열음은 ‘으’를 붙여 적는데 네덜란드어의 어말 무성 파열음은 짧은 모음 뒤에서 받침으로 적는다는 규정 차이 때문에 한글 표기가 각각 ‘뤼브루크’와 ‘뤼브룩’으로 나뉜다.

네덜란드어에서는 간혹 그를 ‘라위스브룩의 빌럼(Willem van Ruysbroeck [ˈʋɪ.ləm.vɑn.ˈrœy̯z.bruk] 빌럼 판라위스브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Ruysbroeck은 오늘날의 브뤼셀 인근 마을인 라위스브룩(Ruisbroek [ˈrœy̯z.bruk])의 옛 철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당시 라위스브룩은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브라반트(네덜란드어: Brabant [ˈbraː.bɑnt]) 공국령으로 만일 기욤/빌럼이 이곳 출신이었다면 자신을 ‘프랑스의 작은형제회 수도사’로 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라위스브룩의 빌럼’이라고 부르는 것은 ‘뤼스브룩의 얀(Jan van Ruusbroec [ˈjɑn.vɑn.ˈryːz.bruk] 얀 판뤼스브룩, 1293년경~1381년)’ 또는 ‘라위스브룩의 얀(Jan van Ruysbroeck [ˈjɑn.vɑn.ˈrœy̯z.bruk] 얀 판라위스브룩)’으로 알려진 이곳 출신의 신비주의 신학자와의 혼동으로 인한 실수로 보인다.

한편 프랑스어에서는 그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라틴어의 탈격형을 아예 이름처럼 써서 ‘뤼브뤼키스(Rubruquis [ʁy.bʁy.kis])’라고 부르기도 한다. 에스파냐어에서도 ‘루브루키스(Rubruquis [ru.ˈbɾu.kis])’라고 흔히 부른다. 이와 비슷하게 피렌체 공화국의 빈치(이탈리아어: Vinci [ˈvin.ʧi], 오늘날의 이탈리아) 출신이라서 ‘빈치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이탈리아어: Leonardo da Vinci [leo.ˈnar.do.da.ˈvin.ʧi], 1452년~1519년)’라고 불리는 화가이자 과학자, 발명가를 ‘다빈치’로 부르는 일도 종종 있다. 하지만 다빈치는 성이 아니라 그냥 그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말이므로 연구가들은 이름인 ‘레오나르도’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마찬가지로 출신지를 나타내는 말인 ‘뤼브뤼키스/루브루키스’보다는 이름인 ‘기욤/빌럼’으로 부르는 것이 나을 듯하다.

그런데 백과사전이나 역사책에서 뤼브루크의 기욤/뤼브룩의 빌럼을 소개할 때는 그를 프랑스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플랑드르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뤼브루크가 프랑스령 플랑드르(프랑스어: La Flandre française [la.flɑ̃.dʁə.fʁɑ̃.sɛːzə] 라 플랑드르 프랑세즈네덜란드어: Frans-Vlaanderen [ˌfrɑns.ˈflaːn.də.rən] 프란스플란데런)에 속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플랑드르는 벨기에의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을 이르는 이름으로 주로 쓰이지만 중세의 플랑드르는 프랑스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이 북해와 만나는 지역, 즉 지금의 벨기에 북서부와 여기에 맞닿은 프랑스 북부·네덜란드 남서부에 있던 백작령이었다. 플랑드르 백작은 프랑스 왕의 신하였으나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양쪽으로부터 봉토를 받았으며 별 간섭 없이 영지를 다스렸다. 플랑드르 백작령은 명목상 프랑스 왕국에 속했지만 실질적인 독립국이었는데 모직물 산업으로 부를 축적하여 번창했기 때문에 이를 탐낸 프랑스 왕과 맞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1297년~1305년 프랑스·플랑드르 전쟁) 그 후 백년 전쟁(1337년~1453년)에서도 잉글랜드 편이 되어 프랑스 왕과 다시 맞서 싸웠다. 왕과 신하가 서로 전쟁을 치른 셈인데 잉글랜드 왕도 당시에는 프랑스에 봉토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자국의 왕인 동시에 프랑스 왕의 신하였으니 봉건 시대의 중세 유럽은 오늘날의 국가 관계에 대한 상식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플랑드르 백작령은 1369년 부르고뉴 공국에 합병되어 독립적인 영지의 지위를 상실한 뒤에도 명목상으로는 존속되어 신성로마제국, 에스파냐, 오스트리아 등의 지배 밑에 들어가는 복잡한 역사를 겪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 때인 1795년에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프랑스에 할양되면서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1815년 빈 회의에서 옛 플랑드르 백작령의 대부분은 네덜란드 연합왕국에 들어갔으며 벨기에의 분리독립 이후에는 대부분이 벨기에에 들어가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한편 프랑스의 루이 14세(프랑스어: Louis XIV [lwi.ka.tɔʁzə] 루이 카토르즈, 재위 1643년~1715년)는 에스파냐와의 전쟁 끝에 1659년 피레네 조약을 통해 현재의 프랑스령 플랑드르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며 계속된 영토 확장 활동을 통해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프랑스령 플랑드르 전체가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이 프랑스령 플랑드르를 제외한 플랑드르 백작령은 중세 프랑스 봉토 가운데 유일하게 오늘날의 프랑스에 속하지 않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중세 역사를 다룰 때 유독 플랑드르는 프랑스와 구별해서 다루며 그 출신 인물은 프랑스인이라기보다는 플랑드르인으로 보통 소개한다. 플랑드르 백작령의 남서부가 명목상의 프랑스 봉토를 넘어서 프랑스의 일부가 된 것은 후대에야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플랑드르 백작령에 속했던 지역은 이웃하는 옛 브라반트 공국에 속했던 지역과 함께 네덜란드어 방언을 쓰는 주민이 많았다. 그래서 14세기부터는 플랑드르와 브라반트 지역에서 쓰는 네덜란드어를 플랑드르어라고 부르기도 했다. 브라반트 지역에서 쓴 언어는 16세기경에 시작된 표준 네덜란드어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표준 네덜란드어라고 하면 오늘날의 네덜란드 영토에서만 발달했다고 여기기가 쉽지만 오늘날 브라반트 지역의 대부분은 벨기에에 속한다.

19세기에는 벨기에에서 사용 언어에 따라 지역을 구분할 때 옛 플랑드르 백작령과 옛 브라반트 공국에 속했던 지역은 물론 옛 론(네덜란드어: Loon [ˈloːn]) 백작령에 속했던 지역까지 아울러 플랑드르라고 흔히 부르기 시작하였다. 옛 론 백작령에 속했던 지역은 림뷔르흐(네덜란드어: Limburg [ˈlɪm.bʏrəx]) 주가 되었는데 이 이름은 중세의 림부르크(독일어: Limburg [ˈlɪm.bʊrk])/랭부르(프랑스어: Limbourg [lɛ̃.buːʁ])/림뷔르흐 공국에서 따왔다. 벨기에의 림뷔르흐 주의 동쪽에 접하는 네덜란드의 주도 같은 이름의 림뷔르흐 주인데 정작 중세의 림부르크/랭부르/림뷔르흐 공국의 중심부는 오늘날의 벨기에 남쪽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에 있었고 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림뷔르흐 주와 거의 영토가 겹치지 않았다. 그러니 역사를 따지면 잘 들어맞지 않는 이름이지만 어쨌든 오늘날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림뷔르흐 주를 합쳐 림뷔르흐라고 한다. 중세의 림부르크/랭부르/림뷔르흐 공국의 수도는 오늘날 프랑스어권의 마을인 랭부르(Limbourg)이므로 한글 표기에서는 지역을 일컫는 림뷔르흐와 마을을 일컫는 랭부르를 혼동할 염려가 없다. 림뷔르흐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는 언어는 표준 네덜란드어와 마찬가지로 고대 저지 프랑크어에서 유래했지만 이웃하는 독일, 룩셈부르크에서 쓰는 중부 프랑크어 방언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림뷔르흐어를 네덜란드어의 방언이 아닌 독자적인 지역 언어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벨기에를 네덜란드어·프랑스어·독일어의 3개 언어권으로 나눌 때 림뷔르흐는 네덜란드어권으로 분류된다. 그러니 오늘날에는 원래의 플랑드르 백작령에 속했던 지역 뿐만이 아니라 브라반트, 림뷔르흐도 아울러 플랑드르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수도 랭부르를 포함하여 중세 림부르크/랭부르/림뷔르흐 공국의 남서쪽에서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어와 비슷한 왈롱어(프랑스어: Wallon [ʽwa.lɔ̃])라는 언어를 썼다. 예전에는 왈롱어를 프랑스어의 일개 방언 정도로 여겼지만 오늘날에는 독자적인 지역 언어로 본다.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등지에서 쓰이는 로망어(통속 라틴어에서 분화한 언어)의 한 갈래를 갈리아로망어라고 하는데 프랑스어와 왈롱어가 둘 다 여기 속한다. 오늘날의 벨기에 남부 대부분에서 왈롱어가 쓰였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역시 갈리아로망어 계통의 피카르디어, 로렌어, 샹파뉴어 등이 쓰였지만 1795년 현 벨기에 영토가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다른 갈리아로망어계 지역 언어들이 프랑스어에 밀리기 시작하였으며 공교육의 언어로 프랑스어가 자리잡으면서 오늘날에는 젊은 층에서 전통 지역 언어를 듣기 힘들다. 하지만 ‘왈롱’은 갈리아로망어(오늘날에는 주로 프랑스어)를 쓰는 벨기에인을 이르는 이름으로 계속 쓰이며 오늘날 벨기에의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을 ‘플랑드르’라고 부르는 것처럼 벨기에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은 왈로니(프랑스어: Wallonie [ʽwa.lɔ.ni])라고 부른다.

《프란다스의 개》 또는 《플란다스의 개》라는 제목으로 흔히 알려진 소설이 있다. 영국 소설가 위다(영어: Ouida [ˈwiːd.ə], 1839년~1908년)의 1872년 작품으로 원 제목은 A Dog of Flanders이다. ‘프란다스/플란다스’는 플랑드르의 영어 이름인 플랜더스(영어: Flanders [ˈflænd.əɹz])가 일본어 중역을 통해서 들어온 표기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벨기에 안트베르펜(네덜란드어: Antwerpen [ˈɑnt.ʋɛrə.pən]; 네덜란드어 표기법을 따르면 ‘안트베르펀’이지만 아직까지 표준 표기는 이전의 ‘안트베르펜’) 근처의 작은 마을인데 안트베르펜은 원래 플랑드르 백작령이 아니라 브라반트 공국에 속한 도시였다. 즉 중세 백작령을 가리키던 ‘플랑드르’라는 지명의 기준이 변하여 같은 네덜란드어권인 이웃 지역도 포함하는 것으로 의미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플랑드르어(네덜란드어: Vlaams [ˈvlaːms] 플람스, 프랑스어: flamand [fla.mɑ̃] 플라망, 영어: Flemish [ˈflɛm.ɪʃ] 플레미시)라고 하면 벨기에에서 쓰는 네덜란드어를 이른다. 그러니 한국어에서는 이 지역을 이를 때 네덜란드어 이름인 ‘플란데런(네덜란드어: Vlaanderen [ˈvlaːn.də.rən])’ 대신 프랑스어 형태를 딴 ‘플랑드르(프랑스어: Flandre [flɑ̃ː.dʁə])’를 쓰는 것은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어는 제2외국어로도 많이 배우고 한글 표기도 오래 전부터 정립된 반면 네덜란드어 표기 규정은 2005년에야 외래어 표기법에 추가되었다. ‘플랑드르’가 표준 표기로 정해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또 네덜란드어 표기법이 추가되었다 하더라도 전통 표준 발음에서 멀어진 네덜란드식 신형 발음에 지나치게 치우쳐 벨기에의 고유명사 표기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점도 있다. 어두의 /v/를 예로 들자면 전통 표준 발음에서는 언제나 [v]로 발음되었고 옛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아직도 어두에서 거의 완전한 유성음 [v]로 발음된다. 벨기에의 나머지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에서는 음성학적으로 어두에서 약간의 무성음화가 관찰되며 이는 [v̥]로 나타낼 수 있고 아직은 [f]와 구별이 가능하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는 북쪽으로 갈수록 무성음화가 진전되어 어두에서 [f]와 합쳐지는 경우가 많고 특히 북부 프리슬란트 발음에 이르러는 어두 뿐많이 아니라 어중에서도 [f]로 발음되는 경향이 강해 /v/ 음소가 아예 /f/와 합쳐진 상태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어권 전체를 보았을 때 이는 지역에 따라 같은 음소 /v/가 위치에 따라 실현되는 변이음의 차이로 봐야 하며 네덜란드어 사전에 쓰이는 발음 표시에서는 아직도 전통 표준 발음에 따라 모든 위치에서 [v][f]를 구별한다. 그런데 네덜란드어 표기법에서는 네덜란드 일부에서 쓰이는 발음 형태를 기준으로 삼았는지 어두의 v는 ‘ㅍ, 프’로 적고 그 외에는 모두 ‘ㅂ, 브’로 적도록 하였다. 그래서 Vlaanderen [ˈvlaːn.də.rən]을 네덜란드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블란데런’이 아니라 ‘플란데런’이다(Frans-Vlaanderen [ˌfrɑns.ˈflaːn.də.rən] 프란스플란데런 에서는 앞 자음의 영향으로 /v/[f]로 무성음화한다). 중세 네덜란드어에서 어두의 마찰음 [f, s][v, z]로 유성음화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의 어두 [v]는 다른 언어의 [f]에 대응되는 경우가 많다. Vlaanderen에서는 어두의 v-가 이웃 언어에서는 f-로 대체되어 프랑스어로는 Flandre, 영어로는 Flanders로 부르니 ‘플란데런’으로 적는 것이 그런데로 문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네덜란드어 표기법의 추가로 네덜란드어 이름에 흔히 등장하는 전치사 van [vɑn]을 ‘반’ 대신 ‘판’으로 적게 한 것은 부작용이 더 많지 않나 한다. 화가 Vincent van Gogh [ˈvɪn.sɛnt.fɑŋ.ˈɣɔχ]는 ‘*고흐, 빈센트 반’으로 쓰는 관용 표기를 표준 표기로 인정하여 예외적으로 네덜란드어 표기법을 적용하지 않았다(여기서 van [vɑn]은 앞뒤 자음에 동화하여 [fɑŋ]으로 발음된다). 벨기에의 전 총리 Herman Van Rompuy [ˈɦɛɾ.mɑn.vɑn.ˈrɔm.pœy̯]는 2009년 3월 25일 제83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네덜란드어 표기법에 따라 ‘판롬파위, 헤르만’으로 정했다가 벨기에 대사관의 요청으로 2010년 9월 15일 제92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벨기에에서 쓰이는 발음에 더 가까운 ‘반롬푀이, 헤르만’으로 고쳤다.

프랑스령 플랑드르의 언어 상황은 어땠을까? 전통적으로 됭케르크(프랑스어: Dunkerque [dœ̃.kɛʁkə], 네덜란드어: Duinkerke [ˈdœy̯ŋ.kɛrə.kə] 다윙케르커)를 중심으로 한 북부에서는 플랑드르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어 방언이 쓰였으며 릴(프랑스어: Lille [lilə], 네덜란드어: Rijsel [ˈrɛi̯.səl] 레이설)을 중심으로 한 남부에서는 프랑스어와 비슷한 갈리아로망어 계통의 피카르디어 방언이 쓰였다. 뤼브루크/뤼브룩은 네덜란드어권인 북부에 속한다. 그러니 이곳 출신인 기욤/빌럼의 모어는 중세 네덜란드어 방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파리에서도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프랑스 왕을 섬겼으니 고대 프랑스어도 구사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뤼브루크/뤼브룩은 프랑스령이므로 프랑스어에 따른 표기인 ‘뤼브루크’로 써야 하겠지만 중세에는 네덜란드어 방언이 우세한 플랑드르 백작령의 일부였으니 13세기의 시대적 배경에 맞는 표기는 네덜란드어를 따른 ‘뤼브룩’일 것이다.

기욤과 빌럼, 윌리엄과 윌렐무스

프랑스어의 기욤(Guillaume [ɡi.joːmə]), 네덜란드어의 빌럼(Willem [ˈʋɪ.ləm])은 고대 고지 독일어의 willo와 helm이 결합한 Willahelm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Willahelm은 Wilhelm이 되어 현대 독일어의 빌헬름(Wilhelm [ˈvɪl.hɛlm])으로 이어진다. 독일어에서 철자 w의 발음이 양순 연구개 접근음 [w]에서 순치 마찰음 [v]로 바뀐 것은 17세기경이니 Willahelm~Wilhelm의 첫 자음은 원래 [w]였다. 갈리아로망어에서는 게르만어 이름 Willahelm~Wilhelm을 Willelmu라는 형태로 받아들였다. 중세에 흔히 쓴 라틴어 형태 가운데 하나인 Willelmus도 여기서 나왔다.

갈리아로망어 가운데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서 쓰인 고대 노르만어(Old Norman)에서는 이것이 다시 Williame과 같은 형태로 변했다(노르만족은 흔히 프랑스어를 썼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그들의 언어인 고대 노르만어는 독자적인 갈리아로망어 계통의 언어이다). 이 이름은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된 노르망디 공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ˈwɪl.jəm.ðə.ˈkɒŋk.əɹ.əɹ] 윌리엄 더 콩커러, 재위 1066년~1087년)의 영향으로 고대 영어(앵글로색슨어)에 널리 퍼졌기 때문에 오늘날 영어에서는 윌리엄(William [ˈwɪl.jəm])이란 형태로 쓴다. 고대 영어에서도 처음에는 이 이름을 Willelm과 같은 형태로 썼지만 잉글랜드 지배층의 언어가 된 고대 노르만어의 영향으로 차츰 William으로 통일된 것이다.

영어와 중세 노르만어에서는 원래의 [w] 음이 보존되었지만 파리 중심으로 쓰인 중앙 프랑스어에서는 이 음소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ɡʷ~ɡw]로 대체되었다. 이는 이후 [ɡ]로 단순화되어 현대 프랑스어의 기욤(Guillaume [ɡi.joːmə])이 된 것이다. 다른 로망어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 같은 이름이 이탈리아어로는 굴리엘모(Guglielmo [ɡuʎ.ˈʎɛl.mo; -ˈʎel-]), 에스파냐어로는 기예르모(Guillermo [ɡi.ˈʎeɾ.mo]), 포르투갈어로는 길례르므(Guilherme [ɡi.ˈʎɛɾ.mɨ]), 카탈루냐어로는 길롐(Guillem [ɡi.ˈʎɛm])이 되었다. 로망어에서 차용어의 [w]를 [ɡʷ~ɡw]로 대체한 예는 이 밖에도 많다. 예를 들어 신대륙에 분포한 초식 도마뱀 몇 종을 가리키는 이름인 ‘이구아나’도 카리브 해 원주민의 언어인 타이노어(Taino) 단어 iwana를 에스파냐어에서 ‘이과나(iguana [i.ˈɣwa.na])’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여담으로 영어에는 [w]를 쓴 고대 노르만어 형태와 [ɡʷ~ɡw]를 쓴 중앙 프랑스어 형태가 공존하는 예가 더러 있다. 노르만어계 warden과 프랑스어계 guardian, warranty와 guarantee, wile과 guile, wage와 gauge 등을 들 수 있다. 1154년 중앙 프랑스어권인 앙주(Anjou [ɑ̃.ʒu])의 백작이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여 헨리 2세(Henry II [ˈhɛn.ɹi.ðə.ˈsɛk.ənd] 헨리 더 세컨드, 재위 1154년~1189년)로 즉위하고 중앙 프랑스어가 잉글랜드 왕실의 언어가 되면서 중세 영어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한편 네덜란드어에서는 [w]가 대부분의 환경에서 순치 접근음 [ʋ]로 바뀌었기 때문에 빌럼(Willem [ˈʋɪ.ləm])이 된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v]에 가까운 음으로 보고 ‘ㅂ’으로 적도록 했지만 사실 순치음인 [v]와 접근음인 [w]의 중간음에 가깝고 네덜란드어에서 w /ʋ/와 v /v/는 서로 구별되는 음소이기도 하다. 또 벨기에의 네덜란드어 발음에서는 보통 양순 접근음 [β̞]로 발음되며 전설모음 /i, ɪ, e/ 앞에서는 변이음 [ɥ]도 흔히 관찰되므로 ‘윌럼’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니 기욤, 빌럼, 윌리엄 등은 원래 같은 이름에서 온 것이다. 물론 현대에는 이들이 각각 다른 이름이다. Guillaume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프랑스어권 출신의 사람은 다른 언어권에 가도 Guillaume으로 불린다. 심지어 프랑스어권 출신이 아니라도 프랑스어식 이름인 Guillaume으로 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중세 인물의 이름, 특히 왕족이나 교황의 이름은 흔히 각 언어에 맞는 번역명을 사용한다. 그래서 같은 인물을 프랑스어로는 Guillaume de Rubrouck, 네덜란드어로는 Willem van Rubroek, 영어로는 William of Rubruck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왕족과 교황의 이름은 번역명을 쓰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현 교황 프란치스코(라틴어: Franciscus)는 이탈리아어로는 프란체스코(Francesco [fran.ˈʧes.ko]), 영어로는 프랜시스(Francis [ˈfɹæːnts.ᵻs]), 프랑스어로는 프랑수아(François [fʁɑ̃.swɑ]) 등으로 부른다. 마치 중국의 역사 인명을 동아시아 각국에서 각각의 한자음을 써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한자 문화권에서 군주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묘호 太宗은 한국에서는 ‘태종’으로 부르고 표준 중국어에서는 ‘타이쭝(Tàizōng)’, 일본어에서는 ‘다이소(たいそう Taisō)’, 베트남어에서는 ‘타이똥(Thái Tông)’으로 부른다.

그러니 역사 인물을 다룬 글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는 이에 주의하여 각 이름에 어울리는 원 언어를 골라야 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라파엘로(이탈리아어: Raffaello [raf.fa.ˈɛl.lo], 1483년~1520년)를 영어 이름인 Raphael에 이끌려 ‘라파엘’로 쓰거나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 [ʒɑ̃.kal.vɛ̃], 1509년~1564년)을 영어 이름인 John Calvin에 이끌려 ‘존 캘빈/칼빈’으로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대신 중세의 인물 가운데는 뤼브루크의 기욤/뤼브룩의 빌럼의 경우처럼 오늘날의 국가 구분의 기준에 명쾌하게 들어맞지 않아 원 언어를 무엇으로 잡을지 정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의 출신지인 뤼브루크는 전통적으로 네덜란드어권이며 13세기에는 네덜란드어가 주로 쓰인 실질적인 독립국인 플랑드르 백작령의 일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원어를 네덜란드어로 간주하고 ‘뤼브룩의 빌럼’으로 쓰는 것이 좋겠지만 오늘날 그의 출신지는 프랑스에 속해있으며 그가 프랑스 왕을 섬겼다는 점, 또 국제적으로 프랑스어가 네덜란드어보다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점도 고려하여 본 글에서는 프랑스어식 표기와 네덜란드어식 표기를 병기하되 프랑스어식 표기를 우선시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네덜란드어식 명칭을 우선시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가 라틴어로 여행기를 기록했으니 아예 라틴어 이름 Willelmus에 따라 ‘윌렐무스’로 적는 것은 어떨까? 중세 인물의 이름을 라틴어 이름에 따라 적은 전례로 이탈리아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라틴어: Thomas Aquinas, 이탈리아어: Tommaso d’Aquino [tom.ˈmaː.zo.da.ˈkwiː.no] 톰마소 다퀴노, 1225년~1274년)’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기욤/빌럼의 경우 라틴어 이름이 통일되어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그의 저서에도 Willelmus, Willielmus, Guillelmus, Guilelmus 등 사본마다 그의 이름 표기가 달라지기 일쑤였다. 또 오늘날 프랑스어의 기욤, 네덜란드어의 빌럼, 영어의 윌리엄, 이탈리아어의 굴리엘모 등에 해당하는 이름은 라틴어로 이탈리아어에 가깝게 ‘굴리엘무스(Gulielmus)’로 주로 통일해서 쓰니 본래의 형태와 차이가 있다.

설령 라틴어 이름에 따라 적는다고 해도 중세 유럽의 라틴어 표기는 까다로운 문제가 많다.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인명)》에 포함된 외래어 표기 용례의 표기 원칙 가운데 라틴어의 표기 원칙이 있지만 몇몇 글자의 표기에 대해서만 쓴 정도이고 고전 라틴어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중세 유럽의 인명에 적용하기는 어색하다. 당장 Willelmus의 w는 고전 라틴어에는 없던 글자이니 당연히 이에 대한 언급이 없을 수 밖에 없다. 고전 라틴어에서 v는 자음으로 쓰일 때는 [w]로 발음되었으나 라틴어의 표기 원칙에서는 ‘ㅂ’으로 적는다(원래 라틴어에는 모음 글자 u와 자음 글자 v의 구별이 없고 둘 다 V 같이 생긴 글자로 나타냈다). 하지만 중세 라틴어에서는 자음 글자 v가  [v]로 발음이 바뀌었기 때문에 게르만어 등 다른 언어에 나타나는 [w] 음을 적기 위해 w라는 글자를 새로 도입했다. 그러니 당대의 발음을 따른다면 Willelmus는 ‘윌렐무스’로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라틴어 이름을 현대 유럽 언어의 발음대로 표기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미 살펴본대로 w로 적는 음의 발음은 후에 네덜란드어에서 [ʋ], 독일어에서 [v] 등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Willelmus의 현대 네덜란드어식 발음을 따르면 ‘빌렐뮈스’, 현대 독일어식 발음을 따르면 ‘빌렐무스’가 된다. 실제로 근세 이후 유럽의 라틴어식 이름은 보통 현대 유럽 언어의 발음대로 흔히 표기한다. 예를 들어 라틴어 이름으로만 알려진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Desiderius Erasmus (1466년~1536년)는 네덜란드어 발음 [de.zi.ˈdeː.ri.jʏs.e.ˈrɑs.mʏs, -jəs-, -məs])에 따라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로 적는 것이 네덜란드어 표기법이 고시된 후 표준 표기로 정해졌다. 대신 예전에 쓰던 라틴어식 표기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도 여전히 널리 쓰인다.

그나마 기욤/빌럼의 출신지는 현재의 프랑스 뤼브루크라는 것에 큰 이견이 없어 상대적으로 수월한 경우이다.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유럽 음악을 지배한 이른바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가들은 출신지가 어디인조차 알기 어려운 경우도 수두룩하다. 작곡가 요하네스 오케헴(네덜란드어: Johannes Ockeghem [jo.ˈɦɑ.nəs.ˈɔ.kə.ɣɛm], 프랑스어: Jean Ockeghem [ʒɑ̃.ɔ.kə.ɡɛm] 장 오크겜, 1420년경~1497년)은 한때 플랑드르 지방, 특히 오늘날 오케헴(네덜란드어: Okegem [ˈoː.kə.ɣɛm])으로 알려진 마을이 있는 현재의 벨기에 북부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1993년 발견된 옛 문서에 의하면 그는 사실 옛 에노(프랑스어: Hainaut [ʽɛ.no]) 백작령에 속한 현재의 벨기에 남부의 생길랭(프랑스어: Saint-Ghislain [sɛ̃.ɡi.lɛ̃])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게 맞다면 그는 네덜란드어권이 아니라 피카르디어권 출신이다. 피카르디어는 프랑스어에 가깝고 오늘날의 생길랭은 프랑스어권이니 출신지를 따지자면 프랑스어식 이름을 기준으로 ‘장 오크겜(Jean Ockeghem)’으로 불러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예전부터 플랑드르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식 이름으로 이미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 프랑스어에서도 그를 네덜란드어식 이름인 Johannes로 부르는 일이 더 흔하다.

참고로 네덜란드어 Johannes는 2음절 이상의 단어에서 마지막 음절의 e를 ‘어’로 적도록 하는 표기 규정에 따라 최근에 ‘요하너스’로 심의된 예도 있지만 기존 용례에서는 대체로 관용 표기를 인정한 ‘요하네스’로 쓰므로 여기서도 ‘요하네스’로 썼다. 대신 Ockeghem [ˈɔ.kə.ɣɛm], Okegem [ˈoː.kə.ɣɛm]은 마지막 음절의 e가 [ə]가 아니라 [ɛ]로 발음되므로 기존 표기 용례 ‘위트레흐트(Utrecht [ˈyː.trɛxt])’에서처럼 ‘오케험’ 대신 ‘오케헴’으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다.

몽골어 표기에 관하여

본 글에서 몽골 제국 관련 인명과 지명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표기를 따르고 괄호 안에 몽골 문자 표기를 블라디미르초프·모스타르트(Vladimirtsov–Mostaert) 표기법에 따라 로마자로 옮겨 적는다. 원래의 몽골 문자 표기는 글꼴 지원 문제로 생략하였다. 현대 몽골어는 독립국 몽골의 표준어인 할하어(Khalkh, 몽골어 키릴 문자: Халх 할흐)와 중국에 속한 내몽골 자치구의 표준어인 차하르어(몽골 문자 전사: Čaqar 차카르, 몽골어 병음: Qahar 차하르)가 공존한다. 몽골의 할하어는 키릴 문자로 표기하며 중국의 차하르어는 몽골 문자로 표기한다. 몽골 문자는 1204년경 위구르 문자를 토대로 만든 것으로 그 철자법은 13세기의 중세 몽골어 발음을 토대로 하였기 때문에 현대 몽골어 발음과 어느정도 차이가 있다. 현재로서는 외래어 표기법에 중세 몽골어나 현대 몽골어 표기 규정이 없고 특히 중세 몽골어의 경우 기존 표기 용례에서도 완전한 일관성을 찾기 힘들다. 여기서 괄호 안에 로마자로 쓴 중세 몽골어 형태 옆에 작은 글씨로 쓴 한글 표기는 외래어 표기법에서 다루지 않는 언어들에 적용되는 원칙을 최대한 따랐으며 γ, q는 각각 ‘ㄱ, ㅋ’으로, ö, ü는 각각 ‘오, 우’로 썼다. 유럽 언어의 표기에서 ö, ü는 보통 전설 모음을 나타내며 ‘외, 위’로 적는데 실제로 기존 학설에서는 중세 몽골어에서 ö, ü, o, u가 각각 /ø, y, o, u/를 나타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현대 몽골어계 언어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발음을 들어 각각 /o, u, ɔ, ʊ/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1741년에 간행된 조선 시대의 몽골어 교본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에서는 ö, ü, o, u를 각각 ‘워, 우, 오, 오’로 썼다는 점도 ö, ü가 전설 모음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로제타와 필레: 고대 이집트 지명에서 이름을 딴 혜성 탐사선

2014년 11월 유럽우주국(ESA)의 혜성 탐사선 로제타(Rosetta) 호에 실린 탐사 로봇 필레(Philae)가 추류모프·게라시멘코(Churyumov–Gerasimenko) 혜성에 착륙하는데 성공했다.

국립국어원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공동 주관하는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이하 외심위)에서는 시사성이 있는 외래어의 규범 표기를 신속하게 결정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실무소위원회를 갖는다. ‘로제타’와 ‘추류모프·게라시멘코 혜성’은 2014년 11월 24일 발표한 2014년도 제31차 실무소위원회 결정 사항 가운데 포함되었으나 언론에서 ‘필레이’, ‘필라이’, ‘필레’로 다양하게 쓰던 탐사 로봇 Philae의 표기는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외심위 본회의로 넘어가게 되었고 2014년 12월 3일 제118차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본회의에서 비로소 ‘필레’로 결정되었다.

로제타 호는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실마리가 된 ‘로제타 석’에서 이름을 땄다. 로제타 석은 두 종류의 이집트 문자와 그리스 문자가 함께 적힌 비문으로 ‘로제타’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아랍어로는 라시드(رشيد‎ Rašīd ar[ra.ʃiːd])로 불리는 지명을 이탈리아어로는 Rosetta it[ro.ˈzet.ta] DiPI ‘로세타’로 부르는데 이것을 영어에서 그대로 따온 것으로 ‘로제타’라는 한글 표기는 영어 발음 en[roʊ̯.ˈzɛt̬.ə] EPD, LPD 를 따른 것이다. 오늘날의 표준 이탈리아어 발음에서 동일 형태소 내부의 모음 사이 s는 [z]로 발음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ㅅ’으로 적기 때문에 Rosetta에 이탈리아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로제타’가 아니라 ‘로세타’가 된다. 이탈리아어에서 모음 사이의 s는 [s] 또는 [z]로 발음되는데 그 분포는 전통 발음과 오늘날의 발음에 따라 다르고 지역에 따라도 차이가 나며 여러 단어에서 [s][z]가 둘 다 가능하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철자 s를 언제나 ‘ㅅ’으로 통일해서 적는다. 프랑스어로는 Rosette fr[ʁɔ.zɛtₔ] ‘로제트’ DPF, 독일어로는 Rosette de[ʁo.ˈzɛt.ə] Duden, DAw ‘로제테’ 또는 de[ʁo.ˈzɛt] Duden ‘로제트’로 부른다.

혜성 착륙 모듈 필레도 마찬가지로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도움을 준 ‘필레 오벨리스크’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가 발견된 필레는 고대 이집트의 사원을 포함한 유적지가 있는 나일 강의 섬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Φίλαι (Phílai) ‘필라이’라고 했고 Philae ‘필라이’는 여기에서 따온 라틴어명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한글 표기에 대한 규정은 지금까지 고시된 외래어 표기법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1986년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된 후 발간된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인명)》의 ‘일러두기’란에 ‘라틴어의 표기 원칙’과 ‘그리스어의 표기 원칙’이 포함되었으며 국립국어원은 2007년경 그리스어의 표기를 고전 그리스어와 현대 그리스어로 나누어 더 자세하게 다루는 그리스어 표기법 시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들은 정식으로 고시된 것은 아니지만 국립국어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표기를 심의할 때 따르므로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지위를 갖는다.

라틴어의 표기 원칙에서 ae는 ‘아이’로 적도록 하고 있다. 이는 ae가 고전 라틴어 발음에서 이중모음을 나타내었기 때문인데 Aëtius ‘아에티우스’, Laërtes ‘라에르테스’, Danaë ‘다나에’처럼 a와 e가 독립적으로 발음될 때는 물론 ‘아에’로 적어야 할 것이다(본 사이트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라틴어의 ae가 이중모음이 아닐 경우 aë로 적는다). 고대 그리스어의 αι (ai)도 ‘아이’로 적는다. 그러니 Philae를 라틴어 이름으로 보면 ‘필라이’로 적어야 하며 고대 그리스어 이름인 Φιλαί (Philaí)도 ‘필라이’로 적는 것이 맞다. 그런데 왜 외심위에서는 ‘필레’로 표기를 정했을까?

먼저 라틴어의 ae를 왜 ‘아이’로 적는지부터 살펴보자. 초기 라틴어(기원전 75년 이전)에서는 ae에 해당하는 음을 ai로 적었으며 이에 따라 발음은 [ai̯]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고전 라틴어에 와서는 철자가 ae로 바뀌었는데 발음은 [aɛ̯] 정도였을 것이다. [i] 같은 고모음부로 끝나는 이중모음은 덜 분명하게 발음하면 [i]를 못 미치고 [e][ɛ] 정도에서 끝날 수 있는데 라틴어의 발음은 이런 식의 변화를 겪은 듯하다. 영어와 독일어의 이중모음 [aɪ̯]도 실제 발음은 [ɪ]에 못 미친다며 정밀 전사에서는 [ae̯][aɛ̯]로 적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독일어 발음 사전인 DAw[aɛ̯]를 쓴다. 그러니 고전 라틴어의 [aɛ̯]는 우리가 ‘아이’로 적는 영어와 독일어의 [aɪ̯]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영어로 된 고전 라틴어 발음 설명에서는 흔히 ae의 발음을 영어의 [aɪ̯]로 묘사한다는 것도 라틴어의 ae를 ‘아이’로 쓰게 된 이유일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라틴어의 ae가 고대 그리스어에서 들어온 말에서 원어의 이중모음 αι (ai)를 적기 위해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스 문자의 ‘알파’ α (a)는 따로 쓰일 때 [a], ‘요타’ ι (i)는 따로 쓰일 때 [i]를 나타낸다. 고전 시기(기원전 5~4세기)의 그리스어에서 αι (ai)는 [ai̯] 정도의 이중모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고전 시기 이후에는 대체로 단순모음으로 발음하게 되었지만 후대에도 고전 그리스어를 흉내낸 학구적인 발음에서는 원래의 이중모음 발음을 의도적으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46년 코린트 전투를 기점으로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의 문화, 특히 수세기 전의 고전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로마의 엘리트 계층은 이런 보수적인 학구적 발음을 배웠기 때문에 그리스어의 αι (ai)를 라틴어의 ae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의 표기 원칙은 사실 실제 그리스어에서 쓰였던 발음을 나타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고전 시기 직후에 이미 단순모음으로 발음하기 시작하여 로마 시대 초에는 완전히 단순모음으로만 변한 αι (ai)는 ‘아이’로 적으면서 수세기가 지난 중세 그리스어에서야 [y]에서 [i]로 변한 ‘입실론’ υ (u)는 ‘이’로 적는 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즉 αι (ai)를 ‘아이’로 적는다면 υ (u)는 ‘위’로 적고 υ (u)를 ‘이’로 적는다면 αι (ai)는 ‘에’로 적어야 앞뒤가 맞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어의 표기 원칙은 고전 라틴어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받아들일 때 쓴 발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면 수수께끼가 풀린다.

당시 υ (u)의 그리스어 발음은 원순모음 [y]였으나 라틴어에는 [y] 음이 없었다. 원래는 υ (u)의 그리스어 발음이 [u]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초기 라틴어에서는 이를 u로 흔히 적었지만 그리스어 발음이 [y]로 바뀌고 난 후에 로마인들은 그리스어에서 차용한 어휘에서 이 음을 적기 위해 새로운 글자인 y를 도입했다. 당시에는 소문자가 없었고 u와 v의 구분이 없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u는 V, y는 Y이다. 이렇게 해서 라틴 문자의 일부가 된 대문자 Y는 그리스 문자에서 입실론 υ (u)의 대문자 Υ와 형태가 같다.

그리스어를 배운 로마의 엘리트 층은 그리스어에서 차용한 어휘에서 y를 [y]로 발음했겠지만 원래 라틴어에서 쓰이던 음이 아니다보니 보통 [i]로 발음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그리스어를 외국어로 배운 라틴어 화자들 가운데는 αι (ai)는 ‘아이’와 비슷한 이중모음으로 발음하면서 υ (u)는 ‘이’와 비슷한 비원순 모음으로 발음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어의 표기 원칙은 이런 이들의 그리스어 발음, 즉 라틴어의 음운 체계에 맞게 단순화시킨 고전 시기 이후의 학구적 그리스어 발음을 따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Φίλαι (Phílai)의 기원전 5세기경 고전 아티카 발음은 grc[ˈpʰí.lai̯] 정도였을 것이다(아테네가 속한 아티카 지방의 방언이 가장 영향력이 컸다). 로마의 엘리트 계층이 배운 학구적 발음도 비슷했을 것이다. 이는 고전 라틴어에서 Philae la[ˈpʰi.laɛ̯]가 되었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대로 그리스어의 αι (ai)는 고전 시기 이후에 단순모음으로 바뀌어 [ɛ]를 거쳐 [e]로 발음이 변했다. 그래서 기원전 1세기 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쓰인 코이네 그리스어 발음에서 Φίλαι (Phílai)는 grc[ˈpʰi.lɛ]가 되었고 오늘날의 현대 그리스어에서 Φίλαι (Filai)는 el[ˈfi.le]로 발음한다. 그리스어 표기법 시안에서도 현대 그리스어의 Φίλαι (Filai)는 ‘필레’로 적는다.

라틴어에서도 원래 이중모음을 나타내던 ae는 속라틴어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전 후기(3~6세기경)에는 [ɛ]로 발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중세 라틴어와 르네상스 이후의 신라틴어에서는 원래의 ae를 e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æ로 적기도 한다. 생물학에서 쓰이는 학명 등 과학 분야에서 쓰이는 라틴어는 신라틴어 발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지질 시대인 팔레오세의 ‘팔레오’는 고대 그리스어의 παλαιός (palaiós)에서 온 신라틴어 접두사 palaeo-에 해당한다.

외래어 표기 용례를 보면 Palestina를 ‘팔레스티나’로 적고 라틴어 표기법을 따른 것으로 표시한 것이 보인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어의 Παλαιστίνη (Palaistínē) ‘팔라이스티네’에서 유래한 이 지명은 고전 라틴어로 Palaestina ‘팔라이스티나’라고 했으며 Palestina는 신라틴어 형태이다. 지금은 영어 이름인 Palestine en[ˈpæl.ᵻ.staɪ̯n] EPD, LPD 의 통용 표기인 ‘팔레스타인’을 주로 쓴다(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원래 ‘팰리스타인’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나 ‘팔레스타인’을 관용 표기로 인정한다). 또 라틴어 표기법을 따랐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고대 그리스어의 Αἰθιοπία (Aithiopía) ‘아이티오피아’에서 유래한 국명 Ethiopia는 ‘에티오피아’로 적는다. 고전 라틴어로는 Aethiopia ‘아이티오피아’라고 했다.

외래어 표기 용례 중에 원 철자를 ae로 주면서 신라틴어 발음을 따라 ‘에’로 적은 예는 이보다도 많다. 고대 그리스어의 Ἀθῆναι (Athênai)에서 온 라틴어 Athenae는 ‘아테네’로, Θῆβαι (Thêbai)에서 온 Thebae는 ‘테베’로, Μυκῆναι (Mukênai)에서 온 Mycenae는 ‘미케네’로, Θερμοπύλαι (Thermopúlai)에서 온 Thermopylae는 ‘테르모필레’로, Νίκαια (Níkaia)에서 온 Nicaea는 ‘니케아’로, Ἀχαιμένης (Akhaiménēs)에서 온 Achaemenes는 ‘아케메네스’로 적는다. 원어를 영어인 Aegean으로 표시한 ‘에게 해’도 Αἰγαί (Aigaí)에서 온 Aegae를 원어로 본다면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참고로 테베는 그리스의 지명이자 오늘날 룩소르의 일부에 해당하는 이집트의 고대 도시 이름이기도 한데 이와 같이 고대 이집트의 지명은 고대 그리스어 이름에서 온 라틴어 이름의 형태로 알려진 것이 많다. 이집트 고왕국의 수도였던 Memphis ‘멤피스’는 Μέμφις (Mémphis) ‘멤피스’에서 왔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는 Ἀλεξάνδρεια (Aleksándreia) ‘알렉산드레(이)아’에서, 카이로의 북서쪽에 있는 Heliopolis ‘헬리오폴리스’는 Ἡλιούπολις (Hēlioúpolis) ‘헬리우폴리스’에서, 아스완의 유적지 Elephantine ‘엘레판티네’ 섬은 Ελεφαντίνη (Elephantínē) ‘엘레판티네’에서 왔다.

국명인 에티오피아와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비롯한 정착된지 오래되고 지명도가 높은 이름에서 라틴어의 ae를 ‘에’로 적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ae를 단순모음으로 발음한 속라틴어로부터 발달한 로망 제어(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등)는 물론 현대 유럽의 언어에서는 하나같이 고전 라틴어의 ae에 해당하는 음을 전통적으로 단순모음으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어로 아테네는 Atene it[a.ˈtɛː.ne] DiPI ‘아테네’, 테베는 Tebe it[ˈtɛː.be] DiPI ‘테베’이다. 고전 라틴어 발음을 따른다고 ae를 ‘아이’로 적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서 Caesar ‘카이사르’ 등 고대 로마와 관련된 어휘는 표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고대 로마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명과 지명은 ae를 ‘에’로 적던 기존의 표기를 그대로 둔 것이 대부분이다.

Philae의 경우 이탈리아어로는 File it[ˈfiː.le] DiPI ‘필레’, 독일어로는 Philae de[ˈfiː.lɛ] DAw 또는 Philä de[ˈfiː.lɛ] Duden ‘필레’, 프랑스어로는 Philæ fr[fi.le] DPF ‘필레’로 부른다. 영어에서는 전통적으로 Philae en[ˈfaɪ̯l.iː] MWGD ‘파일리’로 부르지만 Philae 자체가 잘 알려진 이름이 아니라서 일반인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발음이다. 영어는 대모음 추이의 결과로 라틴어에서 온 이름을 전통적으로 발음하는 방식이 다른 유럽 언어에 비해 원래의 라틴어 발음에서 상당히 멀어져 철자만 보고 라틴어계 어휘의 발음을 짐작하는 것이 꽤 까다롭다. 그래서인지 혜성 착륙 시도를 보도한 방송에서는 물론 유럽우주국 직원들도 다른 유럽 언어에서 쓰이는 발음을 흉내내어 영어로 en[ˈfiːl.eɪ̯] ‘필레이’로 흔히 발음하는 듯하다. 영어에서는 어말에 [ɛ]가 올 수 없으므로 한글로 ‘필레’로 적는 발음은 영어로 불가능하다.

유럽우주국의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으며 관제 센터는 독일 다름슈타트에 있다. 유럽우주국의 공용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이며 탐사 로봇 필레의 제작에는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스위스, 아일랜드, 에스파냐,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캐나다,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가 참여했다. 그러니 특별히 Philae의 영어 발음을 기준으로 할 필요는 없고 프랑스어와 독일어에서 쓰는 발음에 따른 표기가 ‘필레’라는 것이 외심위의 최종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수가 있다.

참고로 미 항공우주국의 Apollo ‘아폴로’ 계획은 영어 발음인 en[ə.ˈpɒl.oʊ̯] EPD, LPD 에 따르면 ‘어폴로’ 계획으로 써야 하니 ‘아폴로’는 라틴어 이름으로 본 표기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기는 현행 외래어 표기법 제정 이전인 1960~70년대 당시 썼던 것을 그대로 인정한 것으로 원래 영어 대신 라틴어 발음을 고려해서 정한 표기였다고 보기 어렵다. Apollo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 Ἀπόλλων (Apóllōn) ‘아폴론’을 로마 신화에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쓴 라틴어 이름이다.

지금까지 여러 언어에서 쓰이는 Philae의 발음을 살펴보았는데 한글 표기는 어느 언어의 발음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먼저 이집트의 지명으로서의 Philae부터 살펴보자.

외래어 표기법에서 지명의 표기는 원지음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제3국의 발음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은 관용을 따르도록 한다. 오늘날 이집트는 아랍어 사용국이므로 Philae는 현지어 이름이 아니다(아랍어 이름은 فيله‎ Fīlah ar[fiː.la] ‘필라’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은 영어의 Philae ‘파일리’, 독일어의 Philae/Philä ‘필레’, 프랑스어의 Philæ ‘필레’, 이탈리아어의 File ‘필레’ 등 라틴어의 Philae ‘필라이’에서 기원한 것들이다. 물론 현대 그리스어 Φίλαι (Filai) ‘필레’는 라틴어를 거치지 않은 고대 그리스어의 Φίλαι (Phílai) ‘필라이’의 직계손인데 그리스어 표기 시안을 보면 지명은 원칙적으로 현대 그리스어 표기법을 적용하게 되어있으니 그리스어로 표기한다 해도 ‘필레’가 맞다. 그러니 영어를 제외한 여러 언어에서 Philae 및 그 변형들은 한글로는 ‘필레’로 표기된다. Philae를 ‘필레’로 적는 것은 아테네, 테베, 미케네 등의 신라틴어식 표기 방식과도 일치한다. 그러니 이집트의 지명 Philae는 ‘필레’로 적을만한 근거가 충분하다.

로제타 호가 지명 로제타의 한글 표기를 그대로 따른 것처럼 지명 Philae를 따른 탐사 로봇도 같은 한글 표기를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명의 표기를 잠시 제쳐두고 탐사 로봇의 이름 표기만 생각해보자. 우선 라틴어 이름으로 보고 표기한다면 실제 외래어 표기 용례에서 라틴어의 표기 원칙의 적용 범위는 고대 로마 관련된 표기에 한정되고 과학 분야에서 쓰이는 라틴어는 이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할만하다. 과학 분야의 라틴어는 고전 라틴어 발음이 아니라 신라틴어 발음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유럽우주국의 세 공용어 가운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기준으로 해도 ‘필레’이고 심지어 영어에서도 Philae의 전통적 발음인 ‘파일리’ 대신 프랑스어와 독일어 발음을 흉내낸 ‘필레이’를 흔히 쓴다는 점이 탐사 로봇의 표기를 ‘필레’로 정하는 과정에서 고려되었을 수 있다.

외심위의 결정은 탐사 로봇의 이름인 Philae을 ‘필레’로 표기한다는 것이지 그 이름의 근원인 이집트의 지명 Philae의 표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지명 Philae도 ‘필레’로 적는 것이 합리적이다.

헬로, 월드!

본 블로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 언어의 발음과 그 전사 방법을 다루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외래어 표기법에 입각하여 외국어를 발음에 따라 어떻게 한글로 표기할지의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주제에 따라 영어 또는 한국어로 글을 쓰려 합니다. 한국어로 글을 쓸 때는 편의상 본 소개글을 제외하고 높임말을 생략한 문어체로 쓰겠습니다.

‘헬로, 월드!’는 영어 Hello, world!를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한글로 적은 것입니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면 보통 Hello, world!를 출력하는 것이 첫번째 예제입니다. 직역하면 ‘세상아, 안녕!’ 정도가 되겠지만 한국어로는 어색한 탓인지 보통 번역하지 않고 씁니다(‘반갑다 세상아!’로 쓰면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어로 쓴 저번 글에 더 자세히 나와있는 것처럼 국제 음성 기호(IPA)로 적으면 hello는 [hə.ˈloʊ̯, hɛ.ˈloʊ̯, ˈhɛl.oʊ̯], world는 [ˈwɜrld]입니다.

대부분의 사전에서 hello의 발음은 [hə.ˈloʊ̯]를 우선시합니다. 여기에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헐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첫 모음 [ə]는 원래의 [ɛ]가 약화된 모음입니다. 영어를 한글로 적을 때 모음이 약화되지 않은 발음과 약화된 발음이 공존하면 약화되지 않은 쪽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따라서 hello는 ‘헐로’가 아니라 [hɛ.ˈloʊ̯, ˈhɛl.oʊ̯]를 기준으로 한 ‘헬로’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1986년 제정된 외래어 표기법 고시본에서 쓰이는 영어 발음기호는 오늘날 주로 쓰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외래어 표기법 고시본에서는 대니얼 존스(Daniel Jones [ˈdæn.jəl.ˈʤoʊ̯nz])의 English Pronouncing Dictionary (EPD) 초판(1917년)에서 제12판까지 쓰인 방식을 따라서 영어의 장모음과 단모음은 장음 부호(ː)만으로 구별했습니다. 이 방식에서는 예를 들어 it [it], eat [iːt], odd [ɔd], awed [ɔːd]와 같이 썼습니다. 그러나 실제 영어 발음에서 it와 eat, odd와 awed는 단순히 모음의 길이의 차이가 아니라 음가의 차이로 구별되며, 특히 미국식 발음에서는 모음의 길이 구별이 상당 부분 사라졌으므로 장음 부호만으로는 영어의 장모음과 단모음을 제대로 나타내기에 부족하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A. C. 김슨(Gimson [ˈɡɪmps.ən])이 편집을 맡은 EPD 제14판(1977년)에서부터 it [ɪt], eat [iːt], odd [ɒd], awed [ɔːd]로 쓰는 등 장음 부호 뿐만이 아니라 장모음과 단모음에 쓰이는 기호 자체를 다르게 해서 구별했고, 오늘날에는 이것이 보편적인 영어 발음 표시 방식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존 웰스(John Wells [ˈʤɒn.ˈwɛlz])의 “IPA transcription systems for English”라는 글에 더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외래어 표기법 고시본에 쓰인 옛 방식을 따르면 hello [hə.ˈloʊ̯, hɛ.ˈloʊ̯, ˈhɛl.oʊ̯][həlou, helou]이고 world [ˈwɜrld][wəːld]입니다. 음절 구분과 강세 표시는 생략하고 모음 앞 이외의 [r]는 발음하지 않는 영국 발음을 기준으로 표시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