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군디아(부르고뉴/부르군트) 이야기

이보다 더 많은 혼란을 초래해왔으며 지금도 계속 혼란을 초래하는 지명은 대기 어려울 것이다.
It would be hard to mention any geographical name which … has caused, and continues to cause, more confusion.

영국의 정치인이자 역사가인 제임스 브라이스(영어: James Bryce [ˈʤeɪ̯mz.ˈbɹaɪ̯s], 1838년~1922년)가 1862년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을 쓰면서 특별히 단 주 “On the Burgundies (부르군디아들에 관해)”에 나오는 말이다. 영어로 버건디(Burgundy [ˈbɜːɹɡ.ənd.i])로 불리고 프랑스어로 부르고뉴(Bourgogne [buʁ.ɡɔɲə]) 또는 역사 지명에 한정하여 뷔르공디(Burgondie [byʁ.ɡɔ̃.di]), 독일어로 부르군트(Burgund [bʊʁ.ˈɡʊnt]), 이탈리아어로 보르고냐(Borgogna [bor.ˈɡoɲ.ɲa]), 네덜란드어로 부르혼디어(Bourgondië [bur.ˈɣɔn.di.jə]) 등으로 불리는 지명을 두고 한 말이다. 본 글에서는 르네상스(프랑스어: Renaissance [ʁə.nɛ.sɑ̃ːsə]) 시대까지는 라틴어 이름이자 다른 이름들의 어원인 부르군디아(Burgundia)로 통일하고 근대 이후로는 각각의 경우에 맞게 프랑스어 이름인 부르고뉴와 독일어 이름인 부르군트를 쓰도록 한다.

브라이스의 글은 영국의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영어: Norman Davies [ˈnɔːɹm.ən.ˈdeɪ̯v.ᵻs], 1939년생)의 2011년작 Vanished Kingdoms: The History of Half-Forgotten Europe (사라진 왕국들: 반쯤 잊혀진 유럽의 역사) 가운데 제3단원 “Burgundia: Five, Six or Seven Kingdoms (c. 411–1795) (부르군디아: 다섯 혹은 여섯, 일곱 개의 왕국(411년경~1795년))”에 인용되었다. 이 책은 제1단원에서 5세기에 서고트족(라틴어: Visigothi 비시고티)이 지금의 프랑스 남부에 세운 톨로사(라틴어: Tolosa) 왕국으로부터 시작하여 1991년 해체된 마지막 제15단원의 소련까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다루었는데 848쪽이나 되는 적지 않은 분량에 난해한 역사 지명과 인명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탓에 조만간 한국어 번역을 접하기는 힘들 듯하다.

브라이스는 “On the Burgundies”에서 부르군디아로 불린 적이 있는 나라 또는 행정 단위를 열 개나 열거했는데 데이비스는 이것도 너무 짧은 목록이라며 부르군디아는 최소 열세 개, 최대 열여섯 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역사적 영토만해도 시기에 따라 오늘날의 독일·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룩셈부르크·벨기에·네덜란드 등에 걸쳐있었다. 지난 글에서 중세의 플랑드르 백작령을 다루면서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등 오늘날의 국가 구분에 딱 들어맞지 않는 중세의 고유명사 표기의 어려움에 대해 얘기했는데 부르군디아는 그보다도 심한 셈이다.

오늘날 부르고뉴는 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한 프랑스의 중동부의 레지옹(프랑스어: région [ʁe.ʒjɔ̃], 지방 행정 구역 최상위 단위) 이름 정도로만 보통 알고 있다. 그런데 데이비스는 부르군디아에 관한 단원을 엉뚱하게도 발트 해 스웨덴 연안의 덴마크령 섬인 ‘발트 해의 진주’ 보른홀름(덴마크어: Bornholm [b̥ɒn.ˈhʌlˀm])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때 덴마크에 속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최남단이 스웨덴에게로 넘어가면서 덴마크령으로 남은 보른홀름 섬은 덴마크 본토보다는 스웨덴에 더 가까워졌는데 여담으로 현지 방언인 보른홀름어(덴마크어: Bornholmsk [b̥ɒn.ˈhʌlˀmsɡ̊] 보른홀름스크)는 표준 덴마크어나 스웨덴어와 상당한 차이가 있어 언어학적 관점에서 흥미를 끈다.

보른홀름의 고대 노르드어 이름은 부르군다홀므르(Burgundaholmr)였다. 책에는 *Burgundarholm으로 나왔는데 이는 다른 저자들도 많이 쓰지만 잘못으로 보인다. 주격어미 -r를 생략하더라도 Burgundaholm이어야 한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홀므르(holmr)는 ‘작은 섬’을 뜻한다. 여기서 주격어미 -r만 떨어져나간 현대 덴마크어의 홀름(holm [ˈhʌlˀm])도 같은 뜻이다. 부르군다(Burgunda)는 ‘부르군트족 사람’을 뜻하는 부르군드르(Burgundr)의 복수 속격형으로 부르군다홀므르는 ‘부르군트족 사람들의 작은 섬’, 즉 ‘부르군트족의 섬’을 뜻하는 셈이다. 종족을 가리킬 때는 복수 주격형인 부르군다르(Burgundar)를 쓰는데 *Burgundarholm으로 쓰는 이들은 이 때문에 헷갈린 듯하다.

참고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쓰는 용어인 ‘부르군트족’은 지명인 부르군디아의 독일어 형태인 부르군트에 족(族)을 붙인 것이다. 부족 이름인 부르군트족은 독일어로 부르군더(Burgunder [bʊʁ.ˈɡʊn.dɐ])라고 한다. 프랑스어로는 뷔르공드(Burgondes [byʁ.ɡɔ̃ːdə]), 라틴어로는 부르군디이(Burgundii) 또는 부르군디오네스(Burgundiones), 영어로는 버건즈(Burgunds [ˈbɜːɹɡ.əndz]) 또는 버건디언스(Burgundians [bəɹ.ˈɡʌnd.i‿ənz, bɜːɹ-])라고 한다. 모두 부르군드(Burgund)와 비슷한 어근 또는 거기서 파생된 형용사형에 복수 어미를 붙인 형태이다. 독일이 생기기 훨씬 전에 유럽 전역을 떠돈 부족이라 특별히 독일어 형태를 쓸 이유가 없으니 그냥 ‘부르군드족’이라고 했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부르군디아라는 지명은 부르군트족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들은 로마 제국을 위협한 게르만 부족 가운데 하나로 자세한 여정은 파악하기 힘들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 남하하여 오늘날의 폴란드를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발트 해를 건너면서 보른홀름 섬에 잠시라도 머물렀기 때문에 ‘부르군트족의 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부르군트족의 언어인 부르군트어는 역시 북유럽 출신인 고트족의 언어 고트어처럼 동게르만어군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료가 부족해 확실하지는 않다. 이들이 쓴 이름들을 봐서는 게르만어계 언어인 것만은 확실하다. 부르군트족의 지도자 이름에 흔히 등장하는 gund-는 ‘싸움, 전투’를 뜻하는 게르만어계 어근이며 이를테면 군도바드(Gundobad, 라틴어: Gundobadus 군도바두스)는 ‘싸움에서 용감한’, 군도마르(Gundomar, 라틴어: Gundomarus 군도마루스)는 ‘싸움으로 이름난’으로 해석할 수 있다(참고로 본 글에서는 부르군트족 인명의 표기는 라틴어에서 격어미 -us 등을 뗀 형태를 기준으로 한다).

데이비스가 열거한 열다섯 개의 부르군디아는 다음과 같다.

  1. 410년~436년: 군다하르의 부르군디아 제1왕국
  2. 451년~534년: 군디오크의 부르군디아 제2왕국
  3. 590년경~734년: 프랑크 왕국의 부르군디아 제3왕국
  4. 843년~1384년: 프랑스의 부르군디아 공작령
  5. 879년~933년: 저지 부르군디아 왕국
  6. 888년~933년: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
  7. 933년~1032년: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아를 왕국)
  8. 1000년경~1678년: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자유백작령(프랑슈콩테)
  9. 1032년~?: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왕국
  10. 1127년~1218년: 신성 로마 제국의 소(小)부르군디아 공작령
  11. 11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방백령
  12. 1384년~1477년: 부르군디아 결합국
  13. 1477년~1791년: 프랑스의 부르고뉴 주
  14. 1548년~1795년: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트 제국권
  15. 1982년~: 프랑스의 부르고뉴 레지옹

데이비스가 쓴 단원의 내용을 간추려 부르군디아의 복잡한 역사를 소개한다.

군다하르의 부르군디아 제1왕국(410년~436년)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부르군디아는 군다하르(Gundahar, 라틴어: Gundaharius 군다하리우스 또는 Gundicharius 군디카리우스 또는 Guntharius 군타리우스독일어: Gundahar [ˈɡʊn.da.haʁ] 군다하르 또는 Gundikar [ˈɡʊn.di.kaʁ] 군디카르프랑스어: Gondicaire [ɡɔ̃.di.kɛːʁə] 공디케르 또는 Gonthaire [ɡɔ̃.tɛːʁə] 공테르 또는 Gonthier [ɡɔ̃.tje] 공티에)라는 부르군트족 지도자가 410년 라인 강 중류의 서쪽 유역에 세운 왕국이다. 수도는 옛 켈트족(라틴어: Celtae 켈타이) 정착촌이었던 보르베토마구스(라틴어: Borbetomagus,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 보름스 독일어: Worms [ˈvɔʁms])로 삼았으며 영토는 남쪽으로 노비오마구스(라틴어: Noviomagus,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 슈파이어 독일어: Speyer [ˈʃpaɪ̯.ɐ])와 아르겐토라툼(라틴어: Argentoratum,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 스트라스부르 프랑스어: Strasbourg [stʁas.buːʁ])까지 뻗었다.

그 당시 이 지역은 로마 제국의 갈리아(라틴어: Gallia) 주의 일부였다. 갈리아 주는 오늘날의 독일의 라인 강 서쪽 부분을 비롯하여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스위스 대부분, 네덜란드 일부 등에 해당했으며 원래 켈트족의 땅이었는데 4세기 무렵 시작된 민족의 대이동으로 부르군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들이 들어와 갈리아인, 즉 로마화한 켈트족 사이에 살고 있었다.

군다하르는 알란족(라틴어: Alani 알라니)의 지도자 고아르(Goar, 라틴어: Goarus 고아루스)와 함께 현지의 갈리아인 원로원 의원 요비누스(라틴어: Jovinus)가 로마에 반기를 들고 모군티아쿰(라틴어: Moguntiacum,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 마인츠 독일어: Mainz [ˈmaɪ̯nʦ])에서 자칭 로마 황제로 옹립되는 것을 도왔다. 이 대가로 요비누스는 부르군트족을 로마의 동맹자(라틴어: Foederatus 포이데라투스)로 선포하였으며 군다하르는 명목상 로마 제국이 다스리는 땅에 부르군트족의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군다하르와 고아르가 세운 꼭두각시 황제 요비누스는 2년 만에 죽임을 당했고 평정을 되찾은 로마 조정은 군다하르도 제거하려고 뜻을 굳혔다. 그래서 부르군디아 제1왕국도 20여년 밖에 더 버티지 못했다. 436년 로마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라틴어: Flavius Aëtius) 장군이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목표로 아틸라(라틴어: Attila)가 이끄는 훈족(라틴어: Hunni 훈니)을 불러들여 부르군디아 왕국을 멸망시키게 한 것이다.

부르군트족 2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전하는 이 사건은 전설을 넘어 게르만족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군다하르는 북유럽 신화의 《볼숭그르 일족의 사가(고대 노르드어: Vǫlsunga saga 불숭가 사가)》에서는 군나르(고대 노르드어: Gunnarr)로, 독일의 《니벨룽의 노래(독일어: Nibelungenlied [ˈniː.bə.lʊŋ.ən.ˌliːt] 니벨룽겐리트)》에는 군터(독일어: Gunter [ˈɡʊn.tɐ])로 등장한다.

군디오크의 부르군디아 제2왕국(451년~534년)

제1왕국의 멸망 후 살아남은 부르군트족의 일부는 훈족 밑에, 일부는 로마 밑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부르군디아 제1왕국을 멸망시킬 때에는 같은 편이었던 로마와 훈족은 451년의 카탈라우눔(라틴어: Catalaunum) 평원 전투에서 서로 맞붙었는데 이때 양 진영에 부르군트족 병사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작전상 승리로 이끈 아에티우스는 군디오크(Gundioch, 라틴어: Gundiochus 군디오쿠스 또는 Gundevechus 군데베쿠스독일어: Gundioch [ˈɡʊn.di̯ɔx] 군디오흐 또는 Gundowech [ˈɡʊn.do.vɛç] 군도베히프랑스어: Gondioc [ɡɔ̃.djɔk] 공디오크)라는 로마 진영의 부르군트족 지도자에게 알프스 지방의 사파우디아(라틴어: Sapaudia 또는 Sabaudia 사바우디아)라는 곳에 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아마도 부르군트족이 이미 이 지역으로 터전을 옮긴 후였을 것이다). 사파우디아는 훗날 프랑스어로 사부아(Savoie [sa.vwa]), 이탈리아어로 사보이아(Savoia [sa.ˈvɔ.ja])로 알려지게 되는 지명의 어원이다. 이것이 제2 부르군디아이다.

게나바(라틴어: Genava, 오늘날의 스위스 서부 제네바 프랑스어: Genève [ʒə.nɛːvə] 주네브)를 중심으로 출발한 부르군디아 제2왕국은 곧 아루스 강(Arus, 오늘날의 손 강 프랑스어: Saône [soːnə])과 로다누스 강(Rhodanus, 오늘날의 론 강 프랑스어: Rhône [ʁoːnə])이 만나는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그리하여 10년 이내에 루그두눔(라틴어: Lugdunum,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리옹 프랑스어: Lyon [ljɔ̃]), 디비오(라틴어: Divio,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디종 Dijon [di.ʒɔ̃]), 베손티오(라틴어: Vesontio,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브장송 Besançon [bə.zɑ̃.sɔ̃]) 등이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부르군디아 제2왕국은 5대를 이어갔으나 내부 분열로 약해지고 6세기초 계속된 전쟁 끝에 제5대 군도마르(Gundomar, 라틴어: Gundomarus 군도마루스 또는 Gundimarus 군디마루스 또는 Godomarus 고도마루스독일어: Godomar [ˈɡoː.do.maʁ] 고도마르프랑스어: Gondemar [ɡɔ̃də.maːʁ] 공드마르)왕 때인 534년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한 프랑크 왕국에 패배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크 왕국의 부르군디아 제3왕국(590년~734년)

프랑크족(라틴어: Franci 프랑키, 프랑스어: Francs [fʁɑ̃] 프랑독일어: Franken [ˈfʁaŋ.kn̩] 프랑켄, 네덜란드어: Franken [ˈfraŋ.kən] 프랑컨)은 라인 강 중하류에서 처음 역사에 등장한 서게르만의 일파이다. 클로비스(프랑스어: Clovis [klɔ.vis], 라틴어: Chlodovechus 클로도베쿠스, 독일어: Chlodwig [ˈkloːt.vɪç] 클로트비히, 네덜란드어: Clovis [ˈkloː.vɪs] 클로비스, 재위 481년~511년)라는 지도자가 최초로 모든 프랑크족의 소왕국들을 통일하여 파리시우스(라틴어: Parisius,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파리 프랑스어: Paris [pa.ʁi])를 수도로 하는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메로빙거(독일어: Merowinger [ˈmeː.ʁo.vɪŋ.ɐ]라틴어: Merovingi 메로빙기프랑스어: Mérovingiens [me.ʁɔ.vɛ̃.ʒjɛ̃] 메로뱅지앵네덜란드어: Merovingen [me.ˈroː.vɪŋ.ən] 메로빙언) 왕조의 창시자가 되었다. 클로비스는 부르군디아 제2왕국의 왕녀 클로틸드(프랑스어: Clotilde [klɔ.tildə], 라틴어: Clotildis 클로틸디스, 독일어: Clothilde [klo.ˈtɪl.də] 클로틸데, 네덜란드어: Clothilde [klo.ˈtɪl.də] 클로틸더)를 둘째 아내로 맞았는데 클로틸드는 남편을 설득시켜 가톨릭교로 개종하게 하였다. 이때까지만해도 프랑크족과 서고트족을 비롯한 갈리아 지역의 게르만족 대부분은 325년의 제1차 니케아(라틴어: Nicaea 니카이아, 오늘날의 터키 서북부 이즈니크 터키어: İznik [ˈiz.nik])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된 아리우스(라틴어: Arius, 336년 사망)의 가르침을 따른 아리우스파(라틴어: Ariani) 기독교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클로비스의 개종은 후에 가톨릭교가 서유럽을 지배하는 계기가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부르군디아 궁정에도 아리우스파가 많았지만 클로틸드는 가톨릭교인으로 자라났다.

클로틸드는 클로비스가 죽은 후에도 아들들을 부추겨 부르군디아 제2왕국을 멸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부르군디아의 왕이었던 클로틸드의 아버지 킬페리크(Chilperic, 라틴어: Chilpericus 킬페리쿠스독일어: Chilperich [ˈçɪl.pə.ʁɪç] 힐페리히프랑스어: Chilpéric [ʃil.pe.ʁik] 실페리크)는 공동 왕이었던 동생 군도바드(Gundobad, 라틴어: Gundobadus 군도바두스독일어: Gundobad [ˈɡʊn.do.bat] 군도바트프랑스어: Gondebaud [ɡɔ̃də.bo] 공드보)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클로틸드는 아들들을 통해 이 원한를 갚으려 한 것이다.

프랑크족은 원래 서게르만어계 언어인 프랑크어를 썼지만 문자 생활은 보통 당시의 국제어인 라틴어로 했기 때문에 기록상으로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프랑크어는 표준화되지 않았다. 북해 인근의 저지대에서 쓴 프랑크어 방언은 후에 네덜란드어의 뿌리가 되며 라인 강 유역의 프랑크어 방언들은 오늘날에는 국경에 따라 독일어의 방언이나 네덜란드어의 방언으로 간주되는 여러 방언들의 뿌리가 된다. 이 가운데 룩셈부르크에서 쓰이는 방언은 20세기에야 뒤늦게 룩셈부르크어로 표준화되어 1984년 프랑스어와 독일어와 함께 공용어의 지휘를 획득한다. 표준 독일어는 오늘날의 독일 중부 지역의 비(非)프랑크어계 고지 독일어 방언들이 원 토대가 되었지만 이웃하는 프랑크어계 방언들의 영향도 꽤 받았다.

한편 수도 파리를 비롯한 서쪽의 프랑크족은 프랑크어를 잊고 갈리아 지방의 통속 라틴어를 쓰게 되는데 이는 고대 프랑스어로 이어진다. 그래서 프랑스어는 어휘나 문법, 발음에서 프랑크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 때문에 같은 라틴어에서 나왔으면서도 이탈리아어나 에스파냐어 같은 다른 로망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실린 프랑크 왕국과 관련된 이름들은 메로빙거, 카롤링거처럼 독일어 형태나 클로비스, 샤를마뉴처럼 프랑스어 형태를 쓴 것이 대부분이다. 본 글에서는 이를 굳이 통일하지 않고 잘 알려진 형태를 따른다.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도 부르군디아라는 영토 단위는 보존되었으며 메로빙거 왕들은 스스로 프랑키아와 부르군디아(라틴어: Francia et Burgundia)의 왕 또는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디아(라틴어: Neustria et Burgundia)의 왕으로 칭하고는 했다. 프랑키아는 프랑크족의 땅을 뜻하는 라틴어 이름으로 프랑스(프랑스어: France [fʁɑ̃ːsə])의 어원이며 네우스트리아는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크 왕국 북서부의 옛 이름이다.

클로비스의 손자 중 한 명인 군트람(독일어: Guntram [ˈɡʊn.tʁam], 라틴어: Gontranus 곤트라누스 또는 Gunthramnus 군트람누스 또는 Gunthchramnus 군트크람누스프랑스어: Gontran [ɡɔ̃.tʁɑ̃] 공트랑, 네덜란드어: Gunthram [ˈɣʏn.trɑm] 휜트람, 재위 561년~592년)은 프랑크 왕국 가운데 부르군디아 지역을 물려받고 왕이 되어 부르군디아 왕국(라틴어: Regnum Burgundiae 레그눔 부르군디아이), 즉 부르군디아 제3왕국을 세웠다. 당시 프랑크 왕국에서는 왕이 죽으면 나라를 여러 아들들에게 나누어주는 분할 상속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군트람은 왕국의 일부만 다스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프랑크 왕국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프랑크 왕국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 여러 왕들이 각자의 영토를 다스리는 형태였다. 군트람의 부르군디아 왕국은 전성기인 587년에는 보르도(프랑스어: Bordeaux [bɔʁ.do], 오늘날의 프랑스 서남부), 렌(프랑스어: Rennes [ʁɛnə], 오늘날의 프랑스 서북부), 파리를 포함한 갈리아 대부분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8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궁재이자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샤를 마르텔(프랑스어: Charles Martel [ʃaʁ.lə.maʁ.tɛl]라틴어: Carolus Martellus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독일어: Karl Martel [ˈkaʁl.ˈmaʁ.təl] 카를 마르텔, 네덜란드어: Karel Martel [ˈkaː.rəl.ˈmɑr.təl] 카럴 마르털, 741년 사망)이 프랑크 왕국을 다시 통일하면서 부르군디아 제3왕국은 사라진다.

서프랑크 왕국/프랑스의 부르군디아 공작령(843년~1384년)

샤를 마르텔의 손자 샤를마뉴(프랑스어: Charlemagne [ʃaʁ.lə.maɲə] 샤를르마뉴라틴어: Carolus Magnus 카롤루스 마그누스(=위대한 카롤루스), 독일어: Karl der Große [ˈkaʁl.deːɐ̯.ˈɡʁoː.sə] 카를 데어 그로세(=위대한 카를), 네덜란드어: Karel de Grote [ˈkaː.rəl.də.ˈɣroː.tə] 카럴 더 흐로터(=위대한 카럴), 이탈리아어: Carlo Magno [ˈkar.lo.ˈmaɲ.ɲo] 카를로 마뇨(=위대한 카를로), 814년 사망)는 프랑크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고 로마 교황에 의해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샤를마뉴가 속한 왕조는 샤를 마르텔(카롤루스 마르텔루스)의 후손들이라 해서 카롤링거(독일어: Karolinger [ˈkaː.ʁo.lɪŋ.ɐ]라틴어: Carolingi 카롤링기프랑스어: Carolingiens [ka.ʁɔ.lɛ̃.ʒjɛ̃] 카롤랭지앵네덜란드어: Karolingen [ka.ˈroː.lɪŋ.ən] 카롤링언이탈리아어: carolingi [ka.ro.ˈlin.ʤi] 카롤린지) 왕조라고 한다.

샤를마뉴가 이룩한 제국은 843년에 이르러 그의 세 손자들이 물려받으면서 서프랑크 왕국·중프랑크 왕국·동프랑크 왕국으로 나누어졌다. 서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의 프랑스로 이어지고 동프랑크 왕국은 독일로 이어졌는데 오늘날 중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온전히 간직한 나라는 없다. 그래서 후대의 관점에서는 중프랑크 왕국이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를 차지한 이는 샤를마뉴의 세 손자들 가운데 장남이자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로타르(독일어: Lothar [ˈloː.taʁ]라틴어: Lotharius 로타리우스, 프랑스어: Lothaire [lɔ.tɛːʁə] 로테르네덜란드어: Lotharius [lo.ˈtaː.ri.jʏs, -jəs] 로타리위스, 이탈리아어: Lotario [lo.ˈtaː.rjo] 로타리오795년~855년)였다.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르의 사후 다시 셋으로 나누어졌다. 북해에서 메스(프랑스어: Metz [mɛs],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까지 이르는 북쪽 부분은 로타르의 이름을 따서 로타링기아(라틴어: Lotharingia, 프랑스어: Lotharingie [lɔ.ta.ʁɛ̃.ʒi] 로타랭지독일어: Lothringen [ˈloː.tʁɪŋ.ən] 로트링겐네덜란드어: Lotharingen [ˈloː.tə.ˈrɪŋ.ən] 로타링언)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이 변하여 오늘날의 로렌(프랑스어: Lorraine [lɔ.ʁɛnə],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이 된다. 또 중프랑크 왕국의 남쪽 부분은 이탈리아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로마까지 내려갔다. 나머지 가운데 부분은 대략 부르군디아와 프로방스(프랑스어: Provence [pʁɔ.vɑ̃ːsə], 라틴어: Provincia 프로빙키아, 오늘날의 프랑스 동남부)에 해당되었다.

옛 부르군디아 왕국의 땅은 대부분 로타르의 중프랑크 왕국에 들어갔으나 약 8분의 1 정도인 북서쪽의 손 강 상류 일대가 서프랑크 왕국에 들어갔다. 이 지역에는 군트람 시대에 중심지였던 샬롱(프랑스어: Chalon [ʃa.lɔ̃], 오늘날의 프랑스 동부)이 포함되었으며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처음에는 서프랑크 왕국의 옛 부르군디아 땅에 특별한 지위가 없었으나 880년대에 서프랑크 왕국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부르군디아는 공작령이 되었다. 이게 서프랑크 왕국(후에 프랑스)의 부르군디아 공작령의 시초이다. 오툉(프랑스어: Autun [o.tœ̃], 오늘날의 프랑스 동부) 백작 출신인 판관공 리샤르(프랑스어: Richard le Justicier [ʁi.ʃaʁ.lə.ʒys.ti.sje] 리샤르 르 쥐스티시에라틴어: Richardus Justitiarius 리카르두스 유스티티아리우스, 이탈리아어: Riccardo il Giustiziere [rik.ˈkar.do‿il.ʤus.tit.ˈʦjɛː.re] 리카르도 일 주스티치에레독일어: Richard der Gerichtsherr [ˈʁɪ.çaʁt.deːɐ̯.ɡə.ˈʁɪçʦ.hɛʁ] 리하르트 데어 게리히츠헤어, 850년경~921년)는 이 지역의 변경공으로 봉해졌고 나중에는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리샤르의 후손들이 계속 부르군디아 공작으로 있다가 1004년에 프랑스 왕이 공작령의 직접 지배권을 차지했으며 그 후로는 봉토로 주어지거나 프랑스 왕이 직접 부르군디아 공작위를 맡았다. 편의상 카롤링거 왕조 대신 카페(프랑스어: Capet [ka.pɛ]) 왕조가 다스리기 시작한 987년부터 서프랑크 왕국 대신 프랑스라고 부르기로 한다.

지체가 있었지만 부르군디아 공작령의 행정 중심지는 결국 디종이 되었다.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클뤼니(프랑스어: Cluny [kly.ni]), 시토(프랑스어: Cîteaux [si.to]) 등의 수도원으로도 유명한데 부르군디아 공작령의 수도사들은 고장 특산품인 포도주 생산을 부흥시키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실질적인 독립국처럼 행동했다 하여 부르군디아 공국이라고도 하는데 후에 프랑스 왕의 지배 밑에 들어갔을 때에도 공작령은 존속되었으므로 본 글에서는 구별하지 않고 공작령으로 통일해서 쓴다. 유럽 언어에서는 공국과 공작령의 구별이 없어 예를 들어 라틴어에서는 둘 다 두카투스(ducatus)라고 부른다.

저지 부르군디아 왕국(879년~933년)과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888년~933년)

한편 중프랑크 왕국에 들어간 옛 부르군디아 왕국 땅 가운데 리옹과 비엔(프랑스어: Vienne [vjɛnə]라틴어: Vienna 비엔나, 오늘날의 프랑스 동남부)을 포함한 남쪽과 남서쪽 부분은 프로방스 왕국(라틴어: Regnum Provinciae 레그눔 프로빙키아이)에 합쳐졌다. 그래서 이를 저지 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Inferior 부르군디아 인페리오르) 왕국이라고도 한다. 문화적으로 부르군디아와 프로방스가 반반이었으며 프랑스·프로방스어(프랑스어: franco-provençal [fʁɑ̃.ko.pʁɔ.vɑ̃.sal] 프랑코프로방살이탈리아어: franco-provenzale [fraŋ.ko.pro.ven.ˈʦaː.le] 프랑코프로벤찰레)라는 독특한 언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의 특징을 둘 다 간직하고 있지만 프랑스어 방언도 아니고 프로방스어 방언도 아니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가 혼합된 언어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오늘날에는 아르피타니아어(프랑스어: arpitan [aʁ.pi.tɑ̃] 아르피탕이탈리아어: arpitano [ar.piˈtaː.no] 아르피타노)라는 이름이 힘을 얻고 있다.

행정 중심지는 아렐라테(라틴어: Arelate,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아를 프랑스어: Arles [aʁlə])이었다. 판관공 리샤르의 형인 보종(프랑스어: Boson [bo.zɔ̃, bɔ-]라틴어: Boso 보소이탈리아어: Bosone [bo.ˈzoː.ne] 보소네, 독일어: Boso [boː.zo] 보조, 재위 879년~887년) 백작이 18개월만에 서프랑크 왕국의 왕 두 명이 죽은 혼란기에 현지 주교들과 귀족들을 설득하여 스스로 왕으로 선출된 것이 왕국이 세워진 배경이었다. 저지 부르군디아 왕국의 영토에는 번영하는 론 강 유역의 무역 지대, 또 대륙 내부와 지중해의 주요 출입구가 포함되었다.

얼마 안 가서 옛 부르군디아 왕국 땅의 북동쪽 부분도 왕국이 되었는데 고지 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Superior 부르군디아 수페리오르) 왕국이라고 부른다. 거기서는 오세르(프랑스어: Auxerre [ɔ.sɛːʁə, o-], 오늘날의 프랑스 중북부) 백작의 아들 로돌프(프랑스어: Rodolphe [ʁɔ.dɔlfə]라틴어: Rudolphus 루돌푸스독일어: Rudolf [ˈʁuː.dɔlf] 루돌프이탈리아어: Rodolfo [ro.ˈdɔl.fo, -ˈdol-] 로돌포, 859~912년)가 본거지인 아가우눔(라틴어: Agaunum, 프랑스어: Agaune [a.ɡoːnə] 아곤, 오늘날의 스위스 서남부 생모리스 프랑스어: Saint-Maurice [sɛ̃.mɔ.ʁisə, -mo-])에서 ‘부르군디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의 행정 중심지는 생모리스였고 강역은 오늘날의 스위스 발레(프랑스어: Valais [va.lɛ]) 주, 보(프랑스어: Vaud [vo]) 주, 뇌샤텔(프랑스어: Neuchâtel [nø.ʃɑ.tɛl]), 제네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걸친 사부아/사보이아 지방, 프랑스 남동부의 도피네(프랑스어: Dauphiné [do.fi.ne]) 북부까지 포함했다. 쥐라 산맥(프랑스어: Jura [ʒy.ʁa], 오늘날의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동쪽에 영토 대부분이 있다고 해서 ‘쥐라 저편의 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Transjurensis 부르군디아 트란스유렌시스, 프랑스어: Bourgogne Transjurane [buʁ.ɡɔ.ɲə.tʁɑ̃s.ʒy.ʁanə] 부르고뉴 트랑스쥐란이탈리아어: Borgogna Transgiurana [bor.ˈɡoɲ.ɲa.tranz.ʤu.ˈraː.na] 보르고냐 트란스주라나)’라고 불러 부르군디아 공작령을 이르는 ‘쥐라 이편의 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Cisjurensis 부르군디아 키스유렌시스, 프랑스어: Bourgogne Cisjurane [buʁ.ɡɔɲə.sis.ʒy.ʁanə] 부르고뉴 시스쥐란이탈리아어: Borgogna Cisgiurana [bor.ˈɡoɲ.ɲa.ʧiz.ʤu.ˈraː.na] 보르고냐 치스주라나)’와 구별하기도 하는데 사실 쥐라 산맥 양쪽 비탈에 걸쳐 있었으므로 정확히 들어맞는 이름은 아니다.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의 주민들은 고집이 세고 본능적으로 외부인을 경계하는 전형적인 고지인이었으며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공국이나 외부의 영향에 더 쉽게 노출된 저지대보다는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이 옛 부르군디아의 자유로운 영혼을 더 잘 간직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훗날 역사에 등장하는 스위스의 뿌리를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에서 찾기도 한다.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아를 왕국)(933년~1032년)

고지 부르군디아의 2대 왕이자 오세르의 로돌프의 아들인 로돌프 2세(937년 사망)는 923년 랑고바르드인의 왕(라틴어: rex Langobardorum 렉스 랑고바르도룸), 즉 이탈리아 왕으로도 즉위하여 한동안 생모리스와 이탈리아의 파비아(이탈리아어: Pavia [pa.ˈviˑ‿a]) 사이를 오갔다.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로돌프 2세에 등을 돌리고 저지 부르군디아의 섭정이던 아를의 위그(프랑스어: Hugues [yɡə], 독일어: Hugo [ˈhuː.ɡo] 후고이탈리아어: Ugo [ˈuː.ɡo] 우고)를 대신 이탈리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자 933년 로돌프와 위그는 기막힌 해결책을 찾았다. 로돌프가 위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위그는 로돌프를 고지와 저지 부르군디아의 연합 왕국의 왕으로 제안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이 탄생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의 상황을 언제나 주시하고 있던 독일에서는 위그와 로돌프의 거래가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다. 작센 공이자 독일 왕이며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는 오토(독일어: Otto [ˈɔ.to]) 1세는 로돌프 2세가 죽자 그의 15세 아들 콩라드(프랑스어: Conrad [kɔ̃.ʁad], 독일어: Konrad [ˈkɔn.ʁaːt] 콘라트이탈리아어: Corrado [kor.ˈraː.do] 코라도)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부르군디아를 침공하고 이탈리아의 위그가 부르군디아마저 물려받는 것을 막았다. 그리하여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은 존속이 허용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두 부르군디아의 연합왕국은 수도가 아를이었기 때문에 아를 왕국, 독일어로는 아렐라트(Arelat [a.ʁe.ˈlaːt])라고 한다. 강역은 빙하로부터 바다까지 펼쳐진 론 강 유역이었다. 북으로는 ‘부르군디아의 문(독일어: Burgundische Pforte [bʊʁ.ˈɡʊn.dɪ.ʃə ˈp͜fɔʁ.tə] 부르군디셰 포르테)’으로도 알려진 벨포르(프랑스어: Belfort [bɛl.fɔːʁ]) 통로를 통해 라인란트(독일어: Rheinland [ˈʁaɪ̯n.lant]) 지방으로 진출이 가능했으며 남쪽의 항구 아를과 마르세유(프랑스어: Marseille [maʁ.sɛjə])를 통해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에 왕래할 수 있었다.

아를에 있는 왕의 지배는 멀리 떨어진 내륙 지방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해서 백작·주교·도시 등이 각각의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비에누아(프랑스어: Viennois [vjɛ.nwa], 오늘날의 프랑스 동남부) 지역에서는 알봉(프랑스어: Albon [al.bɔ̃])을 근거지로 한 백작들이 활약했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인 기그(프랑스어: Guigues [ɡiɡə], 1030년 사망)는 몽스니 산(프랑스어: Mont-Cenis [mɔ̃.sə.ni]이탈리아어: Moncenisio [mon.ʧe.ˈniː.zjo] 몬체니시오, 오늘날의 프랑스 남동부 이탈리아 국경 근처)까지 이르는 작은 제국을 이룩했다. 그의 후손 가운데 한 명이 문장(紋章)으로 돌고래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알봉 백작들은 비에누아의 도팽(프랑스어: dauphin [do.fɛ̃], 라틴어: delphinus 델피누스, ‘돌고래’를 뜻함)이라는 독특한 칭호를 얻게 되었다. 알봉 백작·비에누아 도팽이 다스리는 땅은 도피네(프랑스어: Dauphiné [do.fi.ne], 라틴어: Delphinatus 델피나투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자유백작령(프랑슈콩테)(982년~1678년)

브장송을 중심으로 한 고지 부르군디아 변경 지역의 궁정백작(프랑스어: comte palatin [kɔ̃tə.pa.la.tɛ̃] 콩트팔라탱)들은 알사티아(라틴어: Alsatia,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 알자스 프랑스어: Alsace [al.zasə])와 수에비아(라틴어: Suebia,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 슈바벤 독일어: Schwaben [ˈʃvaː.bn̩])의 독일인들에 맞서 방어하는 대가로 특혜를 누렸다.

982년에는 이탈리아의 왕 아달베르토(이탈리아어: Adalberto [a.dal.ˈbɛr.to], 프랑스어: Aubert [o.bɛːʁ] 오베르 또는 Adalbert [a.dal.bɛːʁ] 아달베르독일어: Adalbert [ˈaː.dal.bɛʁt] 아달베르트)의 아들인 오트기욤(프랑스어: Otte-Guillaume [ɔtə.ɡi.joːmə] 오트기욤이탈리아어: Ottone Guglielmo [o.ˈtoː.ne.ɡuʎ.ˈʎɛl.mo, -ˈʎel-, o.to.ne-] 오토네굴리엘모독일어: Otto Wilhelm [ˈɔ.to.ˈvɪl.hɛlm] 오토빌헬름)이 초대 궁정백작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부르군디아 궁정백작(후에 자유백작)은 36대에 걸쳐 17세기까지 이어졌다.

오트기욤은 1002년에 프랑스의 부르군디아 공작령도 물려받았으나 2년만에 프랑스 왕이 침공하여 공작령을 차지하는 바람에 아를 왕국의 궁정백작령만 남았다. 한편 오트기욤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아를 왕 로돌프 3세는 독일의 왕 하인리히(독일어: Heinrich [ˈhaɪ̯n.ʁɪç]) 2세(재위 1014년~1024년)의 보호를 요청했으며 대신 자신이 후계자 없이 죽으면 그에게 왕국 전체를 물려주기로 했다. 오트기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하인리히 2세가 궁정백작령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막았다.

하인리히 2세가 1024년에 먼저 죽고 오트기욤이 1026년에 뒤를 이었다. 1032년 로돌프 3세가 결국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사촌인 블루아(프랑스어: Blois [blwa]) 백작 외드(프랑스어: Eudes [øːdə]독일어: Odo [ˈoː.do] 오도) 2세와 하인리히 2세의 아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가 아를 왕국의 왕위를 서로 주장하였다. 외드의 주군인 프랑스 왕이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정백작령을 포함한 아를 왕국은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소유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왕국(1032년~?)과 소(小)부르군디아 공국(1127년~1218년), 부르군디아 방백령(1127년~)

아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들어온 뒤 부르군디아 왕국으로 개명되었다. 그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은 1032년 이후 독일 왕국(라틴어: Regnum Teutonicum 레그눔 테우토니쿰), 이탈리아 왕국(라틴어: Regnum Italiae 레그눔 이탈리아이), 부르군디아 왕국(라틴어: Regnum Burgundiae 레그눔 부르군디아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브라이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왕국을 아를 왕국의 연속으로 보았지만 데이비스는 정치적 맥락과 영토가 많이 바뀌었다며 제7왕국으로 따로 친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멀리 떨어진 부르군디아 왕국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 독일어는 부르군디아 왕국에 별로 파고들어가지 못하고 현대 아르피타니아어의 조상인 프랑스·프로방스어가 일상어로 계속 쓰였다.

독일의 체링겐(독일어: Zähringen [ˈʦɛː.ʁɪŋ.ən]) 귀족 가문에 속한 콘라트 1세는 프라이부르크(독일어: Freiburg [ˈfʁaɪ̯.bʊʁk],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를 세워 통합된 지방 행정을 개척한 공로를 황제로부터 인정받아 1127년 부르군디아 왕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새로 지은 소(小)부르군디아(라틴어: Burgundia Minor 부르군디아 미노르독일어: Klein Burgund [ˈklaɪ̯n bʊʁ.ˈɡʊnt] 클라인 부르군트) 공작령을 수여받았다. 소부르군디아 공작령의 강역은 쥐라 산맥 동쪽으로 펼쳐진 지대로 오늘날 스위스의 프랑스어권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소부르군디아 공작령에 속한 방백령(독일어: Landgrafschaft [ˈlant.ɡʁaːf.ʃaft] 란트그라프샤프트)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부르군디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부르군디아 방백령의 강역은 툰(독일어: Thun [ˈtuːn], 오늘날의 스위스 중서부)과 졸로투른(독일어: Solothurn [ˈzoː.lo.tʊʁn], 오늘날의 스위스 서북부) 사이 아르 강(독일어: Aar [ˈaːɐ̯])의 양안에 해당된다. 어쩌면 졸로투른을 조금 지나 있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왕가의 발원지, 합스부르크(독일어: Habsburg [ˈhaːps.bʊʁk] 하프스부르크) 성까지 부르군디아 방백령에 속했을 수도 있다.

체링겐 가문은 총독이자 공작으로서 열심히 활동하며 프리부르(프랑스어: Fribourg [fʁi.buːʁ]), 부르크도르프(독일어: Burgdorf [ˈbʊʁk.dɔʁf]), 무르텐(독일어: Murten [ˈmʊʁ.tn̩]프랑스어: Morat [mɔ.ʁa] 모라), 라인펠덴(독일어: Rheinfelden [ˈʁaɪ̯n.fɛl.dn̩]), 툰 등의 도시를 세웠다(이들은 모두 오늘날 스위스에 있다). 체링겐 가문에서도 특히 적극적으로 활동한 백작 베르톨트(독일어: Berthold [ˈbɛʁ.tɔlt, ˈbɛʁt.hɔlt]) 5세는 툰 성을 세우고 1191년에는 베른(독일어: Bern [ˈbɛʁn]) 시를 세웠다. 그러나 그가 1218년에 후계자 없이 죽은 후 소부르군디아 공국은 사라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가운데 유일하게 부르군디아 왕국에 깊숙이 관여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독일어: Friedrich Barbarossa [ˈfʁiː.dʁɪç.baʁ.ba.ˈʁɔ.sa]), 프랑스어: Frédéric Barberousse [fʁe.de.ʁik.baʁ.bə.ʁusə] 프레데리크 바르브루스, 이탈리아어어: Federico Barbarossa [fe.de.ˈriː.ko.bar.ba.ˈros.sa] 페데리코 바르바로사)는 1152년 아헨에서 독일의 왕, 1154년 파비아에서 이탈리아의 왕으로 각각 즉위한지 한참 지나 1173년에야 아를에서 부르군디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부르군디아 궁정백작의 상속녀 베아트리스(프랑스어: Béatrice [be.a.tʁisə])를 둘째 아내로 맞은 후 부르군디아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 궁정백작령을 직접 통치하고 부르군디아 왕국 내의 다툼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내세울만한 성과를 보지 못했고 1190년 십자군 원정길에 성지에 이르지도 못하고 죽었다.

교황과 황제가 대립한 서임권 투쟁은 양쪽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분열에 일조했다. 부르군디아 왕국은 특히 지배력의 약화에 취약했다. 산악 지형 때문에 거기서 벌이는 군사 작전마다 불확실성을 내포했다. 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려면 먼저 독일의 왕으로 즉위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이 자동적으로 우선시되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교황이 있는 이탈리아가 중요시되었다. 부르군디아 왕국은 상대적으로 황제의 관심 밖에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부르군디아 왕국의 영토는 한 조각 한 조각 떨어져나갔다. 프로방스가 먼저 부르군디아 왕국에서 떨어져나갔고 콩타브네생(프랑스어: Comtat Venaissin [kɔ̃.ta.və.nɛ.sɛ̃])과 리옹, 도피네가 뒤를 이었다.

1127년 프로방스의 마지막 상속녀는 바르셀로나 백작인 남편에게 상속권을 넘겼다. 그리하여 프로방스는 카탈루냐의 지배권 안에 들어가고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권 밖에 놓이게 되었다. 1246년에는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 가문의 마지막 상속녀가 프랑스 앙주 왕가에 속한 남편에게 상속권을 넘겨 이후 프로방스는 프랑스 왕의 가신인 프로방스 백작이 다스리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13세기 초 알비 십자군을 통해 랑그도크(프랑스어: Languedoc [lɑ̃ɡə.dɔk])를 정복하여 론 강 우안까지 진출하였다. 알비 십자군은 가톨릭 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카타리파(라틴어: Cathari, 프랑스어: cathares [ka.taːʁə] 카타르)를 상대로 일으킨 십자군으로 알비(프랑스어: Albi [al.bi]) 시와 그 주변에 카타리파가 많다고 하여 이름이 붙었다. 1274년에는 론 강 맞은편의 콩타브네생 백작이 후계자가 없어 영지를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1348년에는 콩타브네생에 둘러싸인 아비뇽(프랑스어: Avignon [a.vi.ɲɔ̃])이 유배된 교황에게 팔렸다.

론 강 유역의 중심 도시인 리옹은 상업도시로 번영하였으며 매우 중요한 대주교구로 가톨릭 교회의 공의회가 두 차례 리옹에서 열렸다. 1245년 제1차 리옹 공의회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했다. 아직도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리옹에 황제가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리옹은 대주교와 리오네포레(프랑스어: Lyonnais-Forez [ljɔ.nɛ.fɔ.ʁɛ]) 백작, 리옹의 부호들 사이의 고질적인 갈등으로 1311년 들어온 프랑스 군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프랑스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의 요충지 도피네에도 마찬가지로 눈독을 들였는데 알봉 백작·비에누아 도팽들은 도피네를 계속 붙들고 있다 1349년 비로소 프랑스 왕에게 사적으로 매각했다. 그 후로 도피네를 다스리는 알봉 백작의 칭호였던 도팽은 프랑스 왕의 후계자의 작위가 되었다.

이렇게 부르군디아 왕국에서 프랑스를 접한 부분이 차츰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 1264년의 콘라트 4세 이후의 황제들은 부르군디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더이상 공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고위 성직자들은 흔히 실질적인 독립국의 수장인 이른바 대공주교의 지위를 획득했다. 시옹(프랑스어: Sion [sjɔ̃])과 제네바의 주교들은 초기에 독립했고 다른 이들도 뒤따랐다.

북부의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에서는 이미 르노(프랑스어: Renaud [ʁə.no], 독일어: Rainald [ˈʁaɪ̯.nalt] 라이날트) 3세(1148년 사망) 때에 이미 작은 제국을 결성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이웃하는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령의 마콩(프랑스어: Mâcon [mɑ.kɔ̃]) 백작령을 상속받은 후 스스로 황제의 종주권에서 벗어난 ‘자유백작(프랑스어: franc comte [fʁɑ̃ kɔ̃ːtə] 프랑 콩트독일어: Freigraf [ˈfʁaɪ̯.ɡʁaːf] 프라이그라프)’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신성 로마 제국은 벌로 그의 영지 대부분을 빼앗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결혼한 베아트리스는 바로 르노 3세의 딸이었으며 르노의 ‘자유백작령’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1178년에는 르노 3세의 손자인 브장송의 대주교가 교구를 이른바 제국도시(독일어: Reichsstadt [ˈʁaɪ̯çs.ʃtat] 라이히스슈타트)로 만들어 궁정백작령에 봉토 부담금을 내지 않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십 년 후 바젤(독일어: Basel [ˈbaː.zl̩])의 주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대공주교국을 세워 교구 뿐만이 아니라 한때 르노 3세로부터 압수되었던 주변 지역까지도 다스리게 되었다.

훗날 스위스를 이루는 땅의 상당 부분은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디아 왕국의 땅에서 나왔다. 13세기 초 발레 지역 시옹 주교령의 농민 일부가 오늘날의 스위스 동부에 있는 그라우뷘덴(독일어: Graubünden [ɡʁaʊ̯.ˈbʏn.dn̩])으로 이주하여 그들이 가지고 온 교량 건축 기술에 힘입어 쇨레넨(독일어: Schöllenen [ˈʃœ.lə.nən]) 협곡을 지나는 통로를 개설,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귀중한 무역로를 열었다. 1291년 8월 이 통로를 관리하는 우리(독일어: Uri [ˈuː.ʁi]), 슈비츠(독일어: Schwyz [ˈʃviːʦ]), 운터발덴(독일어: Unterwalden [ˈʊn.tɐ.val.dn]) 지방의 주민들은 외부의 간섭을 저지하기로 맹세했다. 이것이 스위스 연맹의 시초이다.

당대에는 상속지가 국경을 무시하고 서로 다른 정치권으로 넘어가거나 혼인을 통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1156년에는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이 독일의 호엔슈타우펜(독일어: Hohenstaufen [ˌhoː.ən.ˈʃtaʊ̯.fn̩]) 왕가에게로 넘어갔으며 1208년에는 바이에른의 안덱스(독일어: Andechs [ˈan.dɛks]) 가문에게로, 1315년에는 프랑스 왕가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1330년에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의 부인인 프랑스의 잔 3세가 어머니로부터 부르고뉴 궁정백작령을 물려받은 후 프랑스에 속한 부르고뉴 공작령과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의 연합이 가시화되었다. 프랑스 왕의 딸인 동시에 부르군디아 궁정백작이 된 마르그리트(프랑스어: Marguerite [maʁ.ɡə.ʁitə], 1310년~1382년)는 이 연합을 재촉하고자 별다른 근거 없이 1366년부터 ‘부르군디아 백작령’ 대신 ‘프랑스콩테(프랑스어: France-Comté [fʁɑ̃sə.kɔ̃.te])’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앞서 르노 3세가 쓴 프랑 콩트, 즉 ‘자유백작’이라는 칭호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마르그리트의 사후 오늘날 쓰는 이름인 ‘프랑슈콩테(프랑스어: Franche-Comté [fʁɑ̃ʃə.kɔ̃.te])’, 즉 ‘자유백작령’이라는 형태로 굳어지게 된다.

부르군디아 결합국(1384년~1477년)

14세기 중반 프랑스 왕국과 부르군디아 공작령·궁정백작령에서 동시에 계승에 관련된 위기가 찾아왔다. 부르군디아 공작인 루브르의 필리프(프랑스어: Philippe de Rouvres [fi.lipə.də.ʁuː.vʁə] 필리프 드 루브르, 1347년~1361년)는 플랑드르 백작령(프랑스어: Flandre [flɑ̃ː.dʁə]네덜란드어: Vlaanderen [ˈvlaːn.də.rən] 플란데런, 오늘날의 벨기에 서북부와 프랑스 북부)의 상속녀 당피에르(프랑스어: Dampierre [dɑ̃.pjɛːʁə])의 마르그리트(프랑스어: Marguerite de Dampierre [maʁ.ɡə.ʁitə.də.dɑ̃.pjɛːʁə] 마르그리트 드 당피에르, 네덜란드어: Margaretha van Male [mɑr.ɣa.ˈreː.ta.vɑn.ˈmaː.lə] 마르하레타 판 말러(말러의 마르하레타))를 아내로 맞았는데 1361년 후계자 없이 단명했다. 복잡한 계승 절차를 통해 프랑스 왕 장(프랑스어: Jean [ʒɑ̃]) 2세가 부르군디아 공작 지위를 상속받고 공작령을 프랑스 왕 직영지로 합병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얼마 안 되어 1364년에 세상을 떴다.

복잡하게 얽힌 계승 문제는 장자 상속권이 무시되고 장 2세의 넷째이자 막내 아들로서 이미 십 대의 나이에 1356년의 푸아티에(프랑스어: Poitiers [pwa.tje])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흑태자를 상대로 전투에 참가했던 용담공 필리프(프랑스어: Philippe le Hardi [fi.lipə.lə.aʁ.di] 필리프 르 아르디(=용감한 필리프)네덜란드어: Filips de Stoute [ˈfi.lɪps.də.ˈstʌu̯.tə] 필립스 더 스타우터(=대담한 필립스)독일어: Philipp der Kühne [ˈfiː.lɪp.deːɐ̯.ˈkyː.nə] 필리프 데어 퀴네(=대담한 필리프))에게 부르고뉴 공작령이 돌아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더구나 용담공 필리프는 루브르의 필리프의 미망인 당피에르의 마르그리트를 아내로 맞았는데 양 부르군디아와 아르투아 백작령(프랑스어: Artois [aʁ.twa],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등 용담공 필리프가 물려받은 영지와 플랑드르 백작령을 비롯 양쪽이 물려받은 기타 영지를 모두 합치니 북해의 불로뉴(프랑스어: Boulogne [bu.lɔɲə],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에서 검은 숲(독일어: Schwarzwald [ˈʃvaʁʦ.valt] 슈바르츠발트, 오늘날의 독일 남서부)에 이르는 제법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 후로도 필리프와 마르그리트의 후손들은 브라반트(네덜란드어: Brabant [braː.bɑnt], 오늘날의 네덜란드 남부와 벨기에 북부·중부) 공국, 룩셈부르크(독일어: Luxemburg [ˈlʊ.ksm̩.bʊʁk], 프랑스어: Luxembourg [lyk.sɑ̃.buːʁ] 뤽상부르, 룩셈부르크어: Lëtzebuerg [ˈlə.ʦə.buɐ̯ɕ] 레체부에르시, 오늘날의 룩셈부르크와 그 주변) 공국 등을 물려받아 영토를 늘려갔다. 프랑스는 1337년 시작된 잉글랜드와의 백 년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통일된 제국 헌법을 도입하고 선거제를 개정한 1356년의 금인칙서의 후폭풍으로 각각 홍역을 치르던 틈을 타서 프랑스도 독일도 아닌 부르군디아라는 실체가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그 뒤에는 오래 전에 사라진 나라인 로타링기아를 부활시킨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깔려있었다.

이 새로운 부르군디아 복합체를 흔히 부르고뉴 공국이라고 하고 용담공 필리프와 그 자손들이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프랑스어: Valois [va.lwa])에 속했다고 해서 발루아 부르고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부르군디아 공작령과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 및 다른 여러 영토가 동군연합으로 합친 것이므로 부르군디아 제국(諸國, 즉 ‘나라들’; 프랑스어: États bourguignons [e.ta.buʁ.ɡi.ɲɔ̃] 에타 부르기뇽, 네덜란드어: Bourgondische landen  [bur.ˈɣɔn.di.sə.ˈlɑn.dən] 부르혼디서 란던독일어: Burgundischen Länder [bʊʁ.ˈɡʊn.dɪ.ʃn̩.ˈlɛn.dɐ] 부르군디셴 렌더) 또는 부르군디아 결합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수장은 공작인 동시에 백작인 ‘공백작’이었다. 그러나 왕은 아니었다. 당시 왕관은 교황이 수여했는데 공백작이 다스리는 모든 영토는 명목뿐이지만 프랑스 왕이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속했으므로 이들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부르군디아 왕을 승인할 교황은 없었다. 하지만 궁정의 화려함과 도시의 부, 적극적인 문화 후원 활동은 당대의 거의 모든 왕들을 능가했다. 부르군디아의 공백작은 공식 칭호만 없을 뿐 사실상 왕이었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영토 기반은 이전의 다른 부르군디아와는 상당히 달랐다. 부르군디아 공작령과 백작령이 중심이 되었지만 멀리 북쪽의 해안 지방이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고 결정적으로 역사적인 부르군디아 지방의 대부분은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브루게(네덜란드어: Brugge [ˈbrʏ.ɣə] 브뤼허, 오늘날의 벨기에 북서부)에서 태어난 당피에르의 마르그리트의 상속지는 남편의 상속지보다 훨씬 크고 부유했다.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프랑스어: Picardie [pi.kaʁ.di])에 해당하는 옛 프랑스 백작령인 베르망두아(프랑스어: Vermandois [vɛʁ.mɑ̃.dwa])와 퐁티외(프랑스어: Ponthieu [pɔ̃.tjø])로부터 각각 오늘날의 네덜란드 서부와 동부에 있었던 옛 신성 로마 제국 백작령 홀란트(네덜란드어: Holland [ˈɦɔ.lɑnt])와 헬데를란트(네덜란드어: Gelderland [ˈɣɛl.dər.lɑnt])까지 펼쳐졌으며 아미앵(프랑스어: Amiens [a.mjɛ̃]), 아라스(프랑스어: Arras [a.ʁɑːs], 이상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브루게, 겐트(네덜란드어: Gent [ˈɣɛnt] 헨트), 브뤼셀(프랑스어: Bruxelles [bʁy.sɛlə], 이상 오늘날의 벨기에), 암스테르담(네덜란드어: Amsterdam [ˌɑm.stər.ˈdɑm], 오늘날의 네덜란드) 등 저지대 나라들의 대도시를 모두 포함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던 위트레흐트(네덜란드어: Utrecht [ˈy.trɛxt], 오늘날의 네덜란드 중부)와 캉브레(프랑스어: Cambrai [kɑ̃.bʁɛ],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의 주교령, 리에주(프랑스어: Liège [ljɛːʒə], 오늘날의 벨기에 동부) 대주교령, 뤽쇠이(프랑스어: Luxeuil [lyk.sœj], 오늘날의 프랑스 동부) 교구 등도 부르군디아의 영향권에 놓여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영토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부와 독일 서북부 일부에 걸친 북쪽 부분을 ‘이쪽 나라들(프랑스어: les pays de par-deçà [le.pɛ.i.də.paʁ.də.sa, lɛ-, -pe-] 레 페이 드 파르드사)’라고 불러 부르군디아 공작령과 백작령이 중심이 된 남쪽의 ‘저쪽 나라들(프랑스어: les pays de par-delà [le.pɛ.i.də.paʁ.də.la, lɛ-, -pe-] 레 페이 드 파르들라)’과 구별했다. 공백작이 북부에서 지낼 때가 많았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나온 이름인데 물론 이 이름을 쓰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이쪽 나라들과 저쪽 나라들이 뒤바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북쪽 영토를 이르기 위해 ‘이쪽 나라들’ 대신 ‘낮은 나라들’ 또는 ‘저지대 나라들(프랑스어: les pays bas [le.pɛ.i.bɑ, lɛ-, -pe-] 레 페이 바)’이라는 표현이 생겼고 이게 네덜란드어로는 ‘더 라허 란던(de Lage landen [də.ˈlaː.ɣə.ˈlɑn.dən])’ 또는 ‘더 네데를란던(de Nederlanden [də.ˈneː.dər.lɑn.dən])’으로 표현되었다. 후자인 ‘네데를란던’은 그 후로 이 지방을 이르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는데 여기서 이름을 딴 오늘날의 네덜란드를 이르는 영어 이름인 ‘더 네덜런즈(the Netherlands [ðə.ˈnɛð.ər.ləndz])’가 나왔고 프랑스어로는 원래의 표현을 그대로 써서 ‘레 페이바(les Pays-Bas [le.pɛ.i.bɑ, lɛ-, -pe-])’라고 한다. 즉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역사적 습관 때문에 오늘날의 네덜란드를 복수형을 써서 ‘저지대 나라들’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정작 네덜란드어에서는 단수형인 ‘네데를란트(Nederland [ˈneː.dər.lɑnt])’를 쓴다. 단 ‘네덜란드 왕국’은 복수형인 ‘네데를란던’을 써서 ‘코닝크레이크 데르 네데를란던(Koninkrijk der Nederlanden [ˈkoː.nɪŋ.krɛi̯ɡ.dɛr.ˈneː.dər.lɑn.dən])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럽의 네덜란드 본토 이외에 카리브 해의 영토도 포함한다고 해서 ‘네덜란드들의 왕국’이란 뜻으로 쓰는 것이다. 영어와 네덜란드어에서는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구별하기 위해 역사 지명으로 쓰인 ‘네덜런즈’와 ‘네데를란던’을 각각 ‘더 로 컨트리스(the Low Countries [ðə.ˈloʊ̯.ˈkʌntɹ.iz])’와 ‘더 라허 란던(de Lage landen)’으로 흔히 바꿔 부르는데 프랑스어에서는 딱히 여기에 해당되는 표현이 없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네덜란드 뿐만이 아니라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와 독일 일부 등도 포함되며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생기기 전에도 쓰인 지명이므로 둘을 구별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확립된 용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 글에서는 ‘저지대 나라들’로 통일한다. 프랑스어의 페이(pays [pɛ.i, pe-]), 네덜란드어의 란트(land [ˈlɑnt]), 영어의 컨트리(country [ˈkʌntɹ.i]) 등은 에타(état [e.ta])/스타트(staat [ˈstaːt])/스테이트(state [ˈsteɪ̯t])와 달리 꼭 정치체를 이르는 것이 아니므로 번역어로는 ‘국가’보다는 ‘나라’가 적절하다.

15세기는 중세 도시의 전성기였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에 속한 저지대 나라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함께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르군디아의 도시들은 예술과 학문과 상업이 같이 번영하는 무대가 되었다. 로베르 캉팽(프랑스어: Robert Campin [ʁɔ.bɛʁ.kɑ̃.pɛ̃], 1378년경~1444년), 얀 판에이크(네덜란드어: Jan van Eyck [ˈjɑn.vɑn.ˈɛi̯k], 1390년경~1441년), 로히르 판데르베이던(네덜란드어: Rogier van der Weyden [ro.ˈɣiːr.vɑn.dɛr.ˈʋɛi̯.dən], 1400년경~1464년), 한스 멤링(독일어: Hans Memling [ˈhans.ˈmɛm.lɪŋ], 1430년경~1494년) 등 이른바 ‘북방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플랑드르 화풍의 거장들은 부르군디아 궁정의 후원을 받고 활동하였다.

음악도 발전했다. 이른바 부르군디아 악파는 디종의 공작 궁정 예배실에서 시작되어 부르군디아 전역, 특히 저지대 나라들에서 번창했으며 브라반트인 기욤 뒤페(프랑스어: Guillaume Dufay [ɡi.jomə.dy.fɛ] 또는 [-dy.fa.i] 뒤파이, 1397년~1470년)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그 뒤를 이은 프랑스·플랑드르 악파도 다성음악의 대가 조스캥 데프레(프랑스어: Josquin des Prez [ʒɔs.kɛ̃.de.pʁe, -dɛ-], 1450년경~1520년)를 중심으로 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하였다.

문학과 철학도 번창했다.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로테르담(네덜란드어: Rotterdam [ˌrɔ.tər.ˈdɑm])의 에라스뮈스(네덜란드어: Erasmus [e.ˈrɑs.mʏs, -məs], 라틴어: Erasmus 에라스무스, 1466년~1536년)도 부르군디아 결합국 사람이었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에서는 라틴어와 더불어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같이 발전했다.

그러나 부르군디아의 공백작들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래도 정치였으며 프랑스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기도 했다. 잉글랜드와 백 년 전쟁을 간헐적으로 벌이고 있던 프랑스의 조정은 아르마냐크(프랑스어: Armagnac [aʁ.ma.ɲak])의 백작이 수령이 된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군디아 및 잉글랜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부르고뉴파’ 사이의 내분에 휘말렸으며 이는 치열한 내전으로 이어졌다. 플랑드르의 모직 산업은 잉글랜드의 양모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플랑드르인들은 자연히 잉글랜드에 우호적이었고 백 년 전쟁에서도 잉글랜드의 편을 들었다. 플랑드르를 차지한 부르군디아 공백작들은 프랑스 군의 지원으로 친잉글랜드파 플랑드르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이들 역시 잉글랜드와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용담공 필리프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어 부르군디아 공백작이 된 용맹공 장(프랑스어: Jean sans Peur [ʒɑ̃.sɑ̃.pœːʁ] 장 상 푀르(=두려움 없는 장)네덜란드어: Jan zonder Vrees [ˈjɑn.zɔn.dər.ˈvreːs] 얀 존더르 프레이스(=두려움 없는 얀)독일어: Johann Ohnefurcht [jo.ˈhan.ˈoː.nə.ˈfʊʁçt, ˈjoː.han-] 요한 오네푸르히트(=두려움 없는 요한))은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내전에 개입하여 1418년 파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용맹공 장은 이듬해 프랑스 왕태자의 추종자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이에 부르군디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힘을 얻은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세력권은 수 년 내에 최고점에 달했다. 그러다가 1435년 부르군디아 편이던 잉글랜드 왕자가 죽자 부르군디아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파리를 프랑스 왕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프랑스 왕은 동맹을 잃은 잉글랜드를 상태로 영토를 수복하여 백 년 전쟁은 1453년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시대는 용담공 필리프의 증손자인 무모공 샤를(프랑스어: Charles le Téméraire [ʃaʁlə.lə.te.me.ʁɛːʁə] 샤를 르 테메레르(=무모한 샤를), 네덜란드어: Karel de Stoute [ˈkaː.rəl.də.ˈstʌu̯.tə] 카럴 더 스타우터(=대담한 카럴), 독일어: Karl der Kühne [ˈkaʁl.deːɐ̯.ˈkyː.nə] 카를 데어 퀴네(=대담한 카를)) 대에 막을 내린다. 샤를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공백작위를 물려받기 전인 1466년에 이미 디낭(프랑스어: Dinant [di.nɑ̃], 오늘날의 벨기에 중남부) 시가 반란을 꾀하고 자신과 어머니를 모욕했다며 주민 모두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살할 것을 명하여 무자비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냈다.

야심에 가득 찬 샤를은 1471년 프랑스 왕의 종주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왕이 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1473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에게서 그를 기존 영토는 물론 로렌 공국, 사부아/사보이아 공국, 클레베 공국(독일어: Kleve [ˈkleː.və], 네덜란드어: Kleef [ˈkleːf] 클레이프, 오늘날의 독일 서부와 네덜란드 동부) 등의 종주권을 가지는 왕으로 인정하겠다는 동의마저 얻어냈으나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왕으로 봉하기 전에 마음을 바꾸었다.

샤를은 영토와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심으로 결국 사방에 적을 만들었고 이들은 1474년~1477년 일련의 부르군디아 전쟁에서 샤를에 맞서 연합하게 된다. 서쪽으로는 프랑스 왕 루이 11세, 동쪽으로는 로렌 공국과 신성 로마 제국, 스위스가 부르군디아를 압박하게 된 것이다.

이미 옛 고지 부르군디아의 상당 부분을 흡수한 스위스는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천적으로 드러났다. 스위스 군과 맞선 세 차례의 큰 전투에서 샤를은 굴욕적으로 참패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전투는 1477년 로렌 공국의 수도 낭시(프랑스어: Nancy [nɑ̃.si], 오늘날의 프랑스 동북부)에서 로렌 공국과 스위스의 연합군을 상대로 벌였는데 여기서 샤를은 전사하고 만다. 이 전투에 대해서 기록한 부르군디아인 역사가 필리프 드 코민(프랑스어: Philippe de Commynes [fi.lipə.də.kɔ.minə])은 무모공 샤를이 유럽의 절반을 얻어도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프랑스 부르고뉴 주(1477년~1791년)와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군트 제국권(1548년~1795년)

수 년 이내에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땅은 흩어졌다.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프랑스가 재빨리 다시 차지하였으며 부르군디아 궁정백작령, 즉 프랑슈콩테는 얼마 후 신성 로마 제국에게 돌아갔다. 공작령과 저지대 나라들의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샤를의 19세 딸 마리(프랑스어: Marie [ma.ʁi]네덜란드어: Maria [ma.ˈriː.a] 마리아독일어: Maria [ma.ˈʁiː.a] 마리아, 1457년~1482년)는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독일어: Maximilian von Habsburg [ma.ksi.ˈmiː.li̯aːn.fɔn.ˈhaːps.bʊʁk] 막시밀리안 폰 하프스부르크, 1459년~1519년)과 결혼하여 공작령을 제외한 부르군디아의 영토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나머지 부르군디아 영토와 완전히 갈라졌다. 부르군디아 공작령은 프랑스 왕국에 되돌려져 부르고뉴 주(프랑스어: province [pʁɔ.vɛ̃ːsə] 프로뱅스)가 되었다. 그런데 헷갈리기 딱 좋게 합스부르크 왕가는 공작령을 잃었으면서도 부르군트 공작이라는 칭호는 계속 썼다. 그래서 1477년부터 1795년까지 합스부르크 황제들이 쓴 부르군트 공작이라는 칭호는 이전의 황제들이 썼던 부르군디아 왕이라는 칭호와 가리키는 영토가 다르다.

궁정백작령, 즉 프랑슈콩테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1477년에는 프랑스가 차지했으나 16년 후 상리스(프랑스어: Senlis [sɑ̃.lis],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반환되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부르군트 상속지에 더해졌다.

이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은 수많은 구성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여러 구성 영토를 묶은 제국 크라이스(독일어: Reichskreis [ˈʁaɪ̯çs.kʁaɪ̯s] 라이히스크라이스, 라틴어: circulus imperii 키르쿨루스 임페리이)라는 행정 단위를 도입했다. 제국 크라이스의 번역명은 확립된 것이 없고 관구라고 쓰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가톨릭 교회의 행정 구역명과 같고 ‘원, 동그라미’를 뜻하는 크라이스의 원 뜻을 살리지 못하므로 여기서는 제국권(帝國圈)이라고 쓰도록 한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독일에서는 비슷한 용어인 란트크라이스(독일어: Landkreis [ˈlant.kʁaɪ̯s]) 또는 크라이스(독일어: Kreis [ˈkʁaɪ̯s])가 쓰이는데 이 경우는 대한민국의 군(郡)에 대응되는 하위 행정 구역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옛 부르군디아 영토 대부분은 1548년에 부르군트 제국권(독일어: Burgundischer Reichskreis [bʊʁ.ˈɡʊn.dɪ.ʃɐ ˈʁaɪ̯çs.kʁaɪ̯s] 부르군디셔 라이히스크라이스, 네덜란드어: Bourgondische Kreits [bur.ˈɣɔn.di.sə ˈkrɛi̯ts] 부르혼디서 크레이츠, 프랑스어: Cercle de Bourgogne [sɛʁ.klə.də.buʁ.ɡɔɲə] 세르클 드 부르고뉴, 라틴어: Circulus Burgundiae 키르쿨루스 부르군디아이)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계속된 싸움으로 부르군트 제국권의 영토는 차츰 줄어들었다.

1555년에는 제국권의 대부분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파가 다스리는 에스파냐에 넘어갔다. 그러나 25년 내에 그 절반 가량이 ‘일곱 개의 연합한 저지대 나라들의 공화국(네덜란드어: 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 [re.py.ˈbliɡ.dɛr.ˈzeː.vən.və.ˈreː.nɪɣ.də.ˈneː.dər.lɑn.dən] 레퓌블릭 데르 제번 페레니흐더 네데를란던)’, 즉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네덜란드의 전신이다. 그리하여 1715년 에스파냐에서 오스트리아로 반환되었을 때 원래의 20개 주 가운데 여덟 개만 남아있었다.

프랑슈콩테도 1555년 대부분이 에스파냐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수도 브장송만은 제국도시로 남았다가 1651년에야 프랑슈콩테(에스파냐어로는 엘 콘다도 프랑코 El Contado Franco [el.kon.ˈta.ðo.ˈfɾaŋ.ko])의 수도로 복귀했다. 그러나 1678년 네이메헌(네덜란드어: Nijmegen [ˈnɛi̯.ˌmeː.ɣən], 오늘날의 네덜란드 동부) 조약을 통해 백작령이 전부 프랑스에 넘어갔다. 그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 옛 부르군디아 왕국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앙시앵 레짐(프랑스어: ancien régime [ɑ̃.sjɛ̃.ʁe.ʒimə]), 즉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에서 최상위 행정 구역 단위는 프로뱅스, 즉 주였다. 루이 14세로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디종을 주도로 하는 부르고뉴 주와 브장송을 주도로 하는 프랑슈콩테 주가 나란히 프랑스 왕국 내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혁명 이후인 1791년 주(프로뱅스)를 비롯한 옛 행정 구역은 모두 폐지되었다. 옛 주에 대한 충성과 주에 따른 문화적 차이를 없애고 공화국에 충성하도록 국민을 통합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옛 주를 대체한 최상위 행정 구역 단위는 ‘분할된 것’을 뜻하는 데파르트망(프랑스어: département [de.paʁ.tə.mɑ̃])인데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려 전혀 없이 프랑스 공화국을 단순히 행정의 편의을 위하여 나눈 것으로 예전에 쓰던 이름 대신 강, 산 등 자연 지물의 이름을 붙여 역사적 기억의 단절을 꾀했다. 데파르트망의 크기에도 제한을 두어 혁명 이전에 30여 개 주가 있었던 데에 반해 데파르트망의 수는 곧 백 개 가량으로 늘어났다. 당연히 부르군디아/부르고뉴의 이름은 프랑스의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프랑스의 부르고뉴 레지옹(1982년~2015년)

어쩌면 유럽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된 프랑스에도 20세기에 변화가 찾아왔다. 1982년 지방 행정 구역의 개편으로 데파르트망의 상위 단위인 레지옹이 도입되고 조금이나마 지방 분권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본토에 한정하더라도 백 개 가까이 되던 데파르트망 대신 22개의 레지옹이 지방 행정 구역 최상위 단위가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에서 쓰는 용어에도 혼란이 생겼다. 보통 외국의 최상위 행정 구역은 ‘주(州)’로 번역하는 관습에 따라 1982년 이전에는 프랑스 지방 행정 구역의 최상위 단위였던 데파르트망을 ‘주’라고 했었다. 그래서 레지옹이 도입되자 이전처럼 데파르트망을 계속 ‘주’라고 하고 레지옹의 번역어를 따로 고를지, 아니면 이제부터는 레지옹을 ‘주’라고 하고 데파르트망은 ‘현(縣)’ 같은 다른 번역어로 바꿀지 혼란이 생겼다. 아직 용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 본 글에서는 레지옹, 데파르트망을 번역하지 않고 쓴다.

이를 통해 옛 프로뱅스 이름 상당수가 레지옹 이름으로 부활되었다.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도 레지옹 이름으로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레지옹을 만든 관료들은 혁명 직전의 지도만 참고한 듯 옛 공작령에게만 부르고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군디오크의 부르군디아 제2왕국부터 14세기 초까지 부르군디아의 핵심 영토이던 론 강과 손 강이 만나는 리옹 일대는 ‘론알프(프랑스어: Rhône-Alpes [ʁo.nalpə])’라고 이름붙인 레지옹에 포함시켰다. 관료들은 론알프 레지옹도 다른 어떤 레지옹 못지않게 부르고뉴(부르군디아)로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하다.

프랑스의 부르고뉴프랑슈콩테 레지옹(2016년~)

데이비스의 부르군디아에 대한 단원은 여기서 끝을 맺지만 부르군디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2014년 프랑스의 총리가 된 마뉘엘 발스(프랑스어: Manuel Valls [ma.nɥɛl.vals])의 제안으로 기존 레지옹의 통합을 통해 수를 줄이는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기획되었다. 그러자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 두 레지옹의 지사는 4월 14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두 레지옹을 합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자발적으로 통합 의사를 밝힌 레지옹은 이 둘 뿐이다. 나머지 레지옹의 개편은 중앙 의회에서 논의하고 결정했는데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는 외부의 개입 없이 스스로 통합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2014년 12월 17일 프랑스 의회는 프랑스 본토의 레지옹을 기존의 22개에서 13개로 수를 줄이는 개편안을 확정 발표하였다. 새 지방 행정구역은 2016년 1월 1일 발효되었다. 가칭 부르고뉴프랑슈콩테(프랑스어: Bourgogne–Franche-Comté) 레지옹이 새로 생긴 것이다. 공식 명칭은 2016년 7월 1일까지 정하기로 했는데 아마도 부르고뉴의 이름이 들어갈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데이비스의 목록에 제16 부르군디아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르군디아의 역사적 핵심 영토 가운데 론 강 유역은 빠졌지만 부르군디아 결합국의 북쪽 저지대 나라들을 제외한 ‘저쪽 나라들’이 다시 뭉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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